투명인간이었다. 2시간 넘는 회의 내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언어조차 익숙하지 않았다. 의견은 있었다. 하지만 엉뚱하게 튈까봐 눈치를 보다 기회를 놓쳤다. 주제는 이미 머리 속을 떠났고, 나는 왜 이 자리에 있을까 생각하다보니 회의는 끝났다. 헤어지는데, 허탈했다.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입을 크게 벌려도 보고 거울을 꺼내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나, 여기 있는데….” 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십수 년 전 기억이다. 어떤 회의였는지, 누가 참석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소매 끝단의 누런 얼룩은 어제 일 같다.
10여 년 전엔 나도 투명인간이었다
투명인간이 되었던 경험을 가진 사람은 많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때로는 가정에서. 경험이 독이 되지 않으려면 투명인간 망토를 빨리 벗는 방법밖에 없다. 어디를 가도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할 때, 마음은 병든다. 장시간 투명인간이 된 사람은 자기 힘으로 망토를 벗기 힘들다. 감기 나았느냐고 묻는 선생님, 의견이 듣고 싶다는 동료, 손을 잡는 연인이 있다면 그제야 망토 벗을 힘을 얻는다. 마음에 힘이 생기면 다음은 문제없다. 그러나 그런 힘 얻기가 쉽지 않다. 사람들은 인색하다. 잔인해지기도 한다. 늘 없는 사람인데 평생 없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순간 그의 존재는 사라진다. 집단적으로 작정하면 투명인간은 명백한 따돌림의 대상이 된다. 따돌림을 당한 사람은 자기 존재를 놓기도 한다. 사무치게 외로워서 그렇다.
지난 6월10일 대통령은 항쟁의 정신을 이어받아 민주주의를 발전시키자고 했다. 그런데 같은 시간, 서울시청 바깥 대한문에선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신부, 시민이 짐승처럼 맞으면서 경찰에 끌려갔다. 분향소가 있던 자리에 화단을 설치한 것도 모자라, 비닐몇 장으로 둘러친 농성장조차 말끔히 청소하기 위해서였다. 5·16 쿠데타 기념식이 있는 날이었으면 비웃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민주주의와 항쟁이라는 말을 쓰면서, 하나님 (신천지) 맙소사! 잡혀간 쌍용차 노조 김정우 지부장은 구속됐다. 같은 날 경찰은 신문지를 깔고 노상에서 잠든 고동민 조합원의 사지를 들어, 신문지를 빼앗아 찢어버리면서 말했다고 한다. “야간에 노상에서 누워 있으면 불법 집회다.” 청와대·검찰·법원·구청이 나서 보이지 않는 사람 취급한다. 더 나아가 경찰은 그들이 눈앞에서 사라지기를 노골적으로 원한다.
얼마나 많은 투명인간들이 존재하는가. 불법이라 불리는 이주민, 예산과 비용이 문제니 닥치고 집과 시설에 갇혀 있어야 하는 장애인, 나이도 어린 것이 어디서 나대냐며 구박받는 청소년, 사랑한 것이 죄가 되어 혐오와 폭력에 시달리는 동성애자, 사원증도 아닌 출입증으로 십수 년 다니는 회사에서 해마다 해고되고 해마다 부활하는 비정규직…. 법조차 보호막이 되지 못하는 사회에서 투명인간들은 괴롭다. 그리고 그걸 외면하는 사회는 지나치게 못돼먹었다. 십수 년전 그때는 없는 사람 취급을 하는 선배들에 대한 원망보다 초라한 내가 더 미웠다. 그런데 돌아보니, 나를 몰아세울 게 아니었다. 선배들이 예의가 없었다. 선배들이 나한테 그래선 안 되었다.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은 지금, 내 앞에는 커다란 마이크가 있다. 발언의 무게는 묵직해졌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부터 내가 할 일은 말수를 줄이는 것이다. 다른 이들이 마이크 앞에 설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줄 차례다. 나도 그러할 것이다. 당신들도 좀 그래야 한다. 안 그러면 투명망토 입고, 한밤중에 당신한테 갈 거다. 분명, 나라면 그럴 거다. 가서 뭘 할 거냐고? 고동민한테 물어봐라, 한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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