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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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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 있냐?

부글부글
등록 2013-06-11 15:32 수정 2020-05-03 04:27

역시 기자는 호기심이 많아야 하나봐요. 이럴 거였으면, 어릴 적 ‘탐구생활’ 좀 열심히 풀 걸 그랬죠. 어쩌면 내 호기심의 8할이 사라진 건, 문제지와 해답을 분책하도록 만든 ○○전과를 받아든 순간이었을지 모르겠네요. 힐끔힐끔 해답 넘겨보며 호기심 따위 개나 줘버리며 어느덧 어른이 됐으니 말이죠. 그때 좀더 잘했으면 기자로 먹고살기 편했으려나? 물론 증거는 없는 얘기죠.

동아일보 본사 앞. 사진 이정아 기자

동아일보 본사 앞. 사진 이정아 기자

그래서 그런지 요즘 TV만 켜면 존경심 ‘돋는’ 방송사가 몇 있어요. 보고만 있어도 놀라워 땀이 흥건한 주먹이 절로 쥐어지니 말이에요. 바로 TV조선과 채널A예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더니, 이들 종편의 과도한 호기심이 대중을 ‘뚜껑 열리게’ 하고 있어요. 5·18 광주 민주화항쟁 기념일을 앞두고 TV조선 와 채널A 에서는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보도를 내보냈죠. 역사를 다시 써보겠다는 패기 넘치는 호기심이 없으면 절대 손 못 댔을 아이템일 것 같아요. 물론 이 말, 증거가 있는 건 아니에요.

그러나 종편 방송사는 그저 역사를 새로 쓰려는 패기 넘치는 방송사로만 남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네요. 요즘 인터넷에서 ‘채널A 놀이’를 보급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거든요. 그 시작은 지난 6월5일 서울 목동 방송회관에서 열린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방송심의소위에서 5·18 북한군 개입설 보도 논란의 의견진술을 하러 온 채널A 관계자의 발언이었어요. “이분이 광주에 왔다는 증거가 있느냐”라는 한 심의위원의 질문에 그는 “이분이 광주에 오지 않았다는 증거가 있느냐”고 되받아쳤거든요. 그 뒤로 모든 대화에 “증거가 있느냐”라고 덧붙이는 놀이가 인터넷에서 유행이에요. 채널A가 놀이문화 보급에 정말 애쓰나봐요. 증거는 묻지 마세요.

사실 이 정도로 막강 호기심을 갖고 있는 언론사에는 굵직한 탐사보도를 맡겨야 해요. 다른 언론들이 전재국 시공사 대표의 페이퍼컴퍼니의 실체를 들추기 위해 아랍은행에 킁킁댈 때 과감하게 광주로 시선을 옮기는 이 결단력 좀 보세요. 게다가 방송심의소위에 나온 채널A 관계자는 “충분히 검증하지 못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북한 특수부대의 5·18 개입설의 실체적 사실이 어떠한지는 계속 확인하겠다”고 했어요. 그런 덕에 5·18 역사 왜곡 대책위원회가 이 프로그램 출연자들을 사자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형사고소까지 했어요. 그 증거, 꼭 찾으셔야겠어요!

자, 이제 ‘호기심 채널’ 종편들은 이왕 이렇게 된 김에 5·18의 북한 특수부대 개입설뿐만 아니라 ‘외계인 개입설’도 함께 시원하게 들춰보아요. 우리나라 역사보다 지구 역사를 새로 써보자고요. 그때 외계인이 광주에 안 내려왔다는 증거도 찾을 수 없네요. 호기심을 주체 못하겠다면 스케일 큰 탐사보도에 써보자고요. 호기심 없는 저도 다음주 편집회의 때 ‘채널A 놀이’라도 써먹어야겠어요. “제 기사가 얘기 안 된다는 증거가 있슈?” 그런데 이게 말인지, 막걸리인지 원. 아, 근데 막걸리 아니라는 증거 있수?

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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