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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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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트윗- 진중권과 변희재

등록 2012-11-13 08:08 수정 2020-05-02 19:27

진중권의 트윗놀이 원칙은?
김재철에서 수험생까지 이슈 가리지 않는 오지랖…
정치적 진보, 미학적 자유 원칙 바탕해 상황적 판단 내려

진중권은 트윗놀이를 어떻게 할까? ‘사망 유희’라는 이름이 붙여진 변희재와의 토론 배틀을 앞두고 그가 트윗에서 문제의 ‘뵨’을 어떻게 기선 제압하는지 궁금해 지난 일주일간 그의 트윗놀이를 따라가보았다. 파워 트위터답게 그가 상대하는 사람과 이슈들은 실로 다양했다. 변희재와의 수사적 설전뿐 아니라 최근 문재인·안철수 야권 후보들의 단일화 정국에 대해 제법 진지한 훈수까지 두며 대선 정치에서 범진보 진영의 통 큰 연대를 제안하기도 한다. 물론 이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김재철 MBC 사장 해임안에 대한 청와대와 새누리당의 개입설, 박근혜의 취재진 격리 소식에 대한 비판적 멘트를 팔로어들에게 전한다. 수능을 앞둔 학생들에게 따끔한 한마디, ‘수꼴’ 트위터들과 의 지루한 설전도 잊지 않는다.

진중권의 트윗놀이를 응시하며 내가 가졌던 첫 번째 궁금증은 ‘도대체 그가 트윗을 날리는 기준과 원칙이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알다시피 그는 자신만의 특정한 기준과 원칙을 정하고 그에 반하는 것에는 이념적으로 우나 좌를 가리지 않고 트윗을 통해 기선을 제압한다. 변희재를 비롯한 보수우파 논객들, 새누리당, 박근혜, 김무성 등등이 최근 그의 트윗 공격의 레이더에 상시적으로 걸려 있다. 대체로 정치적 우파, 수구 권력의 장에 있는 자들이다. 진중권은 그뿐 아니라 진보 진영의 논객들과도 싸움을 벌였다. 의 김어준, 하종강·이선옥, 그리고 최근의 김지하에 이르기까지 그는 그만의 원칙에 근거해 인정사정없이 공격한다. 그 원칙은 내가 보기에 정치적 진보와 미학적 자유를 함께 상상하는 상황적인 판단에 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진중권의 트윗놀이의 더 중요한 원칙은 정치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수행적인 것에 있다. 그는 싸움의 게임에서 결코 퇴각하지 않는다. 그에겐 진보와 수구, 혹은 권력에 대해 사전에 결정된 기준이 없다. 다만 그것을 가늠하는 어떤 상황 판단과 그에 걸맞은 수사학이 존재할 뿐이다. 진보에 대한 판단도 상황에 따라 유연할뿐더러, 공격의 수사학도 이미 정해진 도덕적 가이드 라인이 없다. 하종강·이선옥을 지지하는 트 위터들에게 결코 타합하지 않는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는 멘트는 진보의 의미를 텍스트에 가두지 않고, 상황 속에서 그 근거와 원리를 판단하려는 태도가 드러난다.

진중권의 트윗놀이 원칙은 외형적으로 보면 정치적 진영론과 수구 권력에 대한 공격에 있다. 그리고 그 원칙을 가동시키는 방법은 정치적 진보, 미학적 자유, 논리적 명쾌함이다. 그러나 퇴각하지 않는 특유의 원초적 본성으로 인해 때로는 수사학의 논리에 갇히는 경우도 많고, 상황적 판단의 중시 때문에 그가 스스로 비판하는 진영론의 덫에 걸리는 경우도 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 하종강·이선옥에 대해 그가 비판하는 상황 논리를 보면 더더욱 그렇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진중권(왼쪽)씨에 대한 변희재씨의 싸움 걸기는 끝이 없다. 최근 ‘사망유희’ 배틀에서 이들은 또다시 만났다. 사진 한겨레 자료, 한겨레 이정용 기자

진중권(왼쪽)씨에 대한 변희재씨의 싸움 걸기는 끝이 없다. 최근 ‘사망유희’ 배틀에서 이들은 또다시 만났다. 사진 한겨레 자료, 한겨레 이정용 기자

변희재씨 문제는 실력이야
진중권이란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변희재…

싸잡아 비난하는 것 말고는 담론 생산 능력 없는 보수의 상징

변희재를 진중권과 나란히 배열하는 이런 유의 기획이야말로 ‘사망유희’를 보기나 한 것인지 의문스러운, 그의 의도에 놀아나는 것은 아닌지 회의감이 든다. 논객으로서 변희재는 그만큼 별로 평가해줄 가치가, 의미가, 내용이 없는 그저 그런 3류일 뿐이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그리고 그가 ‘보수’를 자처한 이후 새누리당 정권과 보수세력에 자발적으로 ‘짜웅’하며 일궈낸 성과들을 폄하할 생각도 없다. 그는 매체를 만들었고(기사의 퀄리티 여부와는 상관없이), 무슨 포럼도 만들어 대장 노릇을 하고 있으며(역시 퀄리티 여부와는 상관없이), 또 그 외에 잡다한 일들을 벌여가고 있다. 하여 간 별로 자처하는 이가 없어 광활하기가 이를 데 없는 젊은 보수라는, 매우 ‘블루오션’적 인 영역을 점한 그의 비즈니스 감각은 탁월한 처세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논객으로서 변희재의 생명력은 이미 요단강을 건넌지 오래다. 최근 인터넷에 회자되고 있는 대자보 기자 변희재의 10여 년 전 진중권 인터뷰는 역설적이게도 그가 건너간 요단강의 깊이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라고 해야 할 것이다. 변희재는 내심 ‘왜 하늘은 나를 낳고 또 진중권을 낳았는가’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를 ‘유희’하는 대부분의 멀쩡한 사람들은 ‘바보야, 문제는 진중권이 아니라 네 실력이야’를 외치 고 있다. 하지만 변희재는 오늘도 그걸 모른 채, 그저 불타는 질투심과 애끓는 적개심으로 ‘타도, 진중권’을 외치고 있지만 말이다.

변희재의 논리 구조는 대체로 단출하고 언제나 비약적이다. 그의 인식론을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포털을 만들고, 열린우리당을 만들고, 최근에는 까지 만들어 세상을 이렇게 만든 것은 다 386이다. 어떤 386은 종북이다. 종북 386의 대표선수는 진중권이다. 고로 세상을 이렇게 만든 것은 진중권이다”가 된다.

진중권에 대한 변희재의 가학적 집착은 결과적으로 한 개인의 황폐함을 넘어 보수 진영이 갖고 있는 철학적 한계와 부재를 드러내는 비극적 현상이다. 변희재의 사례에 서 보듯 그들은 몇 가지 코드화된 논리로 진보적 논객들을 싸잡는 것 외에는 달리 생산적인 담론 생성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 싸잡음은 대체로 부정확한 정보값에 기인하고 있다.

얼마 전 있었던 진중권과 간결의 토론 역시 이런 부재와 빈약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 토론은 논쟁이라기보다는 자신들만의 갈라파고스가 세계라고 믿으며 살던 원주민을 문명화하는 작업 같아 보이기도 했다. 변희재가 10층을 쌓아 진중권을 깨뜨리겠다고 호언 장담하고 있지만, 그래서 벌써 측은지심이 든다. 10년의 세월이다. 난망한 일이겠지만 부디 변희재가 진중권이란 감옥에서, 386이란 족쇄에서 벗어나 정말 단단한 세계를 구축하길 바라본다. 그래야 이른바 보수 논객이란 이들도 좀 제정신 취급을 받지 않겠나.

김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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