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그랬다. 4·19혁명, 부마항쟁, 5·18 광주항쟁, 6월항쟁…. 김주열·전태일·윤상원·박종철·이한열…. 역사의 고비마다 숱한 피가 민주의 제단에 흩뿌려졌다. 지금 우리의 안식은 그들의 피무덤 위에 핀 꽃이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위태롭다. 고압 전류가 지나는 50m 높이의 송전탑에 오른 현대차 비정규직 해고노동자 최병승·천의봉씨의 “법을 지키라”는 외침은 맵찬 바람에 부서지고, 퇴근길을 재촉하는 시민들의 발길이 분주한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선 김정우 금속노조 쌍용차 지부장이 “함께 살자”며 한 달 가까이 단식농성 중이다. 자존감을 잃지 않고도 주린 배를 채울 한 끼, 지친 몸을 누일 한 평, 그 티끌보다 작은 꿈에 가닿지 못하는 삶이 너무 많다. 독립적 인격체로 살고자 부양의무제·장애등급제 폐지 등 장애인 권익 신장에 힘써온 김주영씨(뇌병변장애 1급)는 ‘다섯 발짝의 절망’에 막혀 삶을 접어야 했다. 입에 문 펜으로 휴대전화 자판을 눌러 화재 신고를 하고, 리모컨을 입으로 조작해 현관문을 열었지만 다섯 발짝도 안 되는 현관까지는 그에게 안드로메다보다 더 멀었다. 김주영씨의 노제에선 “더 이상 죽이지 말라”는 만장이 곡을 했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피에 주린 것일까. 그러나 전쟁하듯 피를 먹고 자란 민주주의는 평화롭지 못하다. 응급실에 실려간 한국 민주주의를 구해낼 뭔가가 절실하다. 피가 아닌 다른 무엇이.
민주정치는 ‘참여’를 먹고 자란다. 가능한 최대 다수의 참여와 결정이 ‘인민주권’의 알짬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의 제도정치권은 참여 의욕을 떨어뜨리고 사회적 약자를 배제하는 거대한 기득권 집단의 상징, 불신과 냉소의 대상이다. 냉소도 정치적 의사 표현의 한 갈래지만, 민주정치의 기반을 좀먹는 치명적 부작용이 있다. ‘무소속 대선 후보 안철수’의 등장은, 제도정치권을 향한 불신과 냉소가 정치 혁신의 열망으로 표출된 것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안철수 현상’의 향배를 주목해야 하는 까닭이다.
안철수 후보가 지난 9월19일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하고 50여 일이 흘렀다. 냉소와 불신은 정치 혁신으로 재조직되고 있는가. 새 정치의 바람은 예상만큼 강하지 않다. 때로 불길한 조짐도 있다. 국회의원 정수 3분의 1 축소, 중앙당 폐지 등을 핵심으로 한 이른바 ‘정치혁신안’이 대표적이다. 각종 조사에서 60%를 넘는 유권자가 이 방안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존 정치권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 ‘안철수’를 통해 표출된 것일 터. 불만의 수렴 통로가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 불만이 대안으로 재조직되지 못한다면 정치 혁신이라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국회의원 정수 축소는 그들을 더 특권화하고, 중앙당 폐지는 국회의원의 토호화를 부추기고 정당정치를 약화시킬 수 있다는 지적이 많다. 그리되면 거대 관료집단과 재벌 등 자본의 전횡은 누가 어떻게 통제하는가. 대통령이? 전문가가? 시민들의 거리시위로?
현대 민주정치는 대의와 참여의 두 바퀴로 굴러간다. 어느 하나만 망가져도 현대 민주정치라는 자전거는 쓰러지고 만다. 대의와 참여는 서로를 배제하기보다 보강해야 한다. 지금 필요한 건 더 많은 참여를 가능하게 할 대의제도의 재조직, 요컨대 정치의 ‘축소’가 아닌 ‘복원’이다. 좋은 정치는 ‘희망’이 아닌 ‘방법’이다. ‘의지’가 아닌 ‘실행’이다. 문제는 정책이다. 이념이 정책이 아니듯, 불만·희망·의지도 정책이 아니다. 한국 민주주의가 피가 아닌 참여와 대의만으로도 잘 자랄 수 있다는 걸 입증할 좋은 정치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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