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능한 국가, 유능한 국민
올림픽, 오래된 피해의 역사가 새로운 한국인 신화 만나는 장면
“에이, 지금이 쌍팔년도도 아니고 누가 올림픽을 열심히 보겠어?” 개막 직전까지만 해도 쿨하게 주고받던 얘기였다. 하지만 웬걸, 2012 런던올림픽은 21세기 들어 열린 어떤 올림픽보다 한국인들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그런데 이번엔 환호와 열광이 아니다.
첫 번째가 개막 직후 열린 박태환 선수의 400m 수영 경기에서 벌어진 어이없는 실격 사건. 나중에 오심이란 게 인정돼 판정이 번복됐지만, 박태환 선수는 심리적으로 흔들린 탓인지 결국 자신의 주력 종목에서 금메달을 따지 못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한국 사람들의 반응은 ‘안타깝지만 사람이 하는 일이니 그럴 수도 있다’ 쪽에 가까웠다. 그러나 대회가 하루하루 치러지며 결정적인 고비마다 유독 한국에 불리한 판정이 내려졌다.
남자 유도에서의 어이없는 오심에 이어 펜싱 여자 에페 4강전 신아람 선수가 ‘멈춰진 1초’로 어이없이 패하자 한국 네티즌들이 드디어 폭발했고 ‘응징’에 나섰다. 당시 펜싱 경기의 주심 바바라 차르 심판의 ‘신상’을 털어버린 것이다. 한국 네티즌들은 차르 심판의 트위터와 페이스북 주소를 공개한 데 이어, 오스트리아의 집 전화번호까지 노출시켜버렸다. 이에 대해 뻔한 도덕적 훈계를 늘어놓고 싶진 않다. 그보다 흥미로운 건 이런 짓을 집단적으로 저지르게 만드는 ‘심리적 서사 구조’다.
한국 사회에서 ‘무능한 국가-자력 구제하는 개인’의 대립은 오랫동안 일종의 보편 서사였다고 할 수 있다. ‘무능한 국가’란 구체적으로는 부패한 정치가, 멍청한 관료, 돈독 오른 자본가라는 3대 악으로 구성된다. 요컨대 ‘잘난 양반들’이 공적 의무를 방기하고 자신들의 사리사욕만을 탐하기 때문에 선량한 백성들이 항상 피를 본다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구한말 이후 오욕과 굴종의 근현대사’는, 곧 외세를 막지 못한 국가의 무능과 외세에 빌붙은 국가에 수탈당하던 백성들의 수난사다. 이른바 ‘관’에 대한 민초들의 원초적 불신은 경험적으로 축적돼온 역사적 산물이다. ‘큰 난리가 나면 국가는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다, 국민 각자는 자력갱생·자력구제해야 한다’는 식의 생각이 사람들 뇌리에 (나이 든 사람일수록) 뿌리 깊게 박혀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서사를 훌륭한 대중예술로 성취한 작품 중 하나가 봉준호 감독의 이었다.
오심 직후 네티즌들이 자력구제에 나선 것도 그런 맥락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대한체육회든,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이든 무능하고 책임감 없는 작자들이다. 억울함을 제대로 어필하지도 못한다. 따라서 우리 스스로 응징해야 한다!’ 올림픽 민족주의 서사도 과거와 조금 달라졌다. 한강의 기적, 국위 선양의 감동 스토리에서 ‘구미 선진국의 질투에 의해 희생당한 우수한 한국인’이라는 스토리로 변화했다. 이 민족주의 서사는 꽤나 기묘한 데가 있다. ‘한민족 개개인은 뛰어난데 국가가 후져서, 기업가는 뛰어난데 정부가 삼류라서 안 된다’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서사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아무튼 런던올림픽은 한국인의 어떤 보편 서사에 불을 댕긴 것 같다.
박권일
계간 ‘R’ 편집위원
진보적 개막식, 보수의 자부심
런던 올림픽 개막식 테마로 등장한 노동과 복지… 거꾸로 신보수주의 자신감 드러내
런던올림픽 개막식이 끝나자 에이든 벌리라는 한 보수당 정치인이 “역대 가장 좌파적인 개막식”이라고 비판을 가했다. 그러자 런던 시장 보리스 존슨은 “언제까지 영국적인 것을 빅벤이나 빨간 이층버스에 못 박아둘 것인가”라고 반론을 제기했다. 언뜻 보면 보수당과 노동당의 공방처럼 보이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보리스 존슨 역시 보수당 소속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아예 그는 직접 개막식에 참가해서 유니언잭을 들고 와이어에 매달려 퍼포먼스를 벌이기까지 했다.
에이든 벌리의 평가와 달리, 이번 개막식 행사는 보수 쪽에게서 많은 찬사를 받았다. 오히려 같은 진보언론에서 보리스 존슨이 차기 수상을 노리고 이런 행사를 기획한 것이 아닌지 의혹을 제기하는 실정이다. 물론 이런 사정은 영국의 문제이고, 이 개막식을 텔레비전을 통해 지켜본 한국 시청자들의 마음은 신선함에 휩싸였다고 할 수 있다. ‘노동’과 ‘복지’라는 한국에서 진보와 보수를 편 가르는 주제가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영국의 모습이 개막식을 통해 드러났기 때문이다.
올림픽 스타디움을 지은 노동자들이 직접 나와서 선수단을 맞이하고, 무상의료제도를 영국적인 것으로 자랑하는 퍼포먼스를 보며 한국 시청자들은 여전히 노동과 복지를 놓고 갑론을박하는 한국 정치의 ‘후진성’을 새삼 느꼈을 것이다. 영국에서는 보수당조차 받아들인 가치를 한국은 여전히 색깔논쟁까지 몰아가며 싸우고 있다는 자각이 일었다고 할 수 있다. 영국 상황에 국한해서 본다면, 개막식은 영국 보수주의자들의 자신감 같은 것을 표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영국적인 것을 과거에 묶어두지 않고 현재에서 다시 찾자는 취지는 보수주의자들이 가진 포용과 관용을 과시하는 제스처처럼 보인다. 또한 이런 제스처를 뒷받침하는 것이야말로 전형적인 신보수주의 논리이기도 하다. 서로 다른 가치를 겹쳐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전략은 신보수주의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이다. 이번 런던올림픽 개막식도 마찬가지였다. 현재의 영국을 수용함으로써 보수주의는 진보가 만들어놓은 성과를 자기 것으로 전유할 수 있다. 신보수주의가 보수의 위기로 인해 발생하는 이데올로기라는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지만, 보수의 생명력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계기이기도 하다.
경직된 보수는 결국 다른 이념을 질식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 결과, 한국의 보수는 그 반대 쪽으로부터 아무것도 얻을 수 없게 되었다. 효율적인 노동 탄압의 기술을 파는 기업이 버젓이 성업하는 것을 용인하는 보수에게 기대할 수 있는 상상력은 없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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