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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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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의 어린이날

가족을 지키기도 버거운 이들에게 ‘가정의 달’ 지키라는 사회
‘아빠’ 선물받고 싶어하는 쌍용차 어린이, 파업 현장에서 놀던 한진중 어린이를 생각하다
등록 2012-05-16 19:04 수정 2020-05-03 04:26
희망열차 85호를 타고 한진중공업 아이들을 방문한 쌍용자동차, 유성기업 아이들이 26일 오후 부산 중구 영주동 부산민주공원 민주항쟁기념관에서 강강수월래를 하면서 즐거워하고 있다. 부산/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희망열차 85호를 타고 한진중공업 아이들을 방문한 쌍용자동차, 유성기업 아이들이 26일 오후 부산 중구 영주동 부산민주공원 민주항쟁기념관에서 강강수월래를 하면서 즐거워하고 있다. 부산/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어린이날 내가 받은 선물은 학교에서 단체로 하얀 비닐봉투에 지우개며 연필, 스케치북 등 각종 학용품과 주스와 과자를 담아주던 게 다다. 그 비닐봉투를 털레털레 들고서는 오전 수업만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하루 종일 텔레비전을 보며 지내던 게 내 어린이날 기억의 전부다.

스승의 날이면 학교에 가기 싫었다. 교탁 위에 쌓이던 꽃이며 선물 더미 사이로 엄마가 일하던 라이터 공장에서 가지고 온 라이터를 몰래 쑤셔놓고 급하게 자리로 돌아와 앉던 내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가난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는 걸 그때 깨우쳤다면, 어린 시절 내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느끼는 이런 통증이 없었을까. 하지만 애석하게도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땐 알지 못했고, 아마 그 때의 나와 같은 아이들, 내 부모와 같은 사람은 지금도 여전히 많이 있을 것이다. 특별한 날에 더욱 외롭고 쓸쓸한 사람들, 감사하고 기념하고 축하해야 할 시간이 불편하고 부담스러워져서 더욱 초라해지는 사람들.

<font color="#A341B1"> 가난한 어린이날의 추억</font>

얼마 전 우연치 않게 일일 아르바이트 자리가 하나 생겼다. 평상시 늘 돈에 목이 졸릴 것 같다 타령하던 선배에게 용돈벌이는 되겠다 싶은 생각에 의사를 물어봤더니 역시나 선뜻 하겠다고 나섰다. 그러고는 며칠 뒤 선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일당 미리 주면 안 될까? 내일모레가 어린이날인데 아이 데리고 마트라도 가고 싶은데….”

격의 없이 친한 사이라 나도 모르게 “일한다면서 그 돈도 없느냐, 내가 아르바이트 안 시켜줬으면 어쩔 뻔했느냐”고 농담인 듯 말해놓고 이내 후회했다. 어릴 적 내 부모님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먹고 죽으려도 돈 없다. 싸준 밥만 먹고 오면 되지 무슨 돈이 필요하노.”

등굣길에 대문을 나서며 ‘엄마, 1천원만’ 하고 벌리던 손에 모질게도 쏟아지던 소리. 어린 마음엔 그게 참 상처가 됐다. 큰돈을 달란 것도 아닌데 그걸 주기 싫어 저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는 엄마가 미웠고, 설사 그것이 사실이래도 단돈 1천원이 없어 끝내 빈손으로 보내는 가난한 우리 집이 싫었다. 고백하면, 나는 우리 집이 가난한 것에 부모의 불성실과 무능이 한몫했다고 믿었다.

근데 먹고 죽으려도 돈이 없다는 말, 내가 어른이 되고 보니 그 말이 가끔은 이해된다. 그리고 나름 열심히 산다고 여겼는데 나 또한 내 부모와 마찬가지로 늘 동동거리며 사는 걸 보며 ‘사는 거 참 녹록지 않구나’ 느낀다. 매달 꼬박꼬박 월급을 받고 빚지지 않고 몸 건강하게 사는 것에 그저 감사하며 살아가는 나 같은 사람도, 5월은 특히 힘든 달이다.

어린이날 아침, 7살 먹은 조카의 “고모, 어린이날인데 선물 안 줘? 레고 사줘!” 하는 소리에 통장 잔고부터 다음달 나올 카드대금까지 발 빠른 셈을 마치고서야 마지못해 겨우 “그래” 하고 대답해놓고 나니 나도 모르게 한숨이 절로 나왔다. 사정 모르고 조르는 조카 때문이 아니라, 이런저런 셈부터 해봐야 하는 내가 괜스레 초라해졌다. 그러니 내 어릴 때 그 ‘단돈 1천원’을 손에 쥐어주지 못한 부모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리고 하루 아르바이트를 해서라도 아이에게 어린이날 선물을 사줄 수 있어 내심 기뻤을 그 선배 마음을 내가 너무 가볍게 대한 건 아닐까 미안해졌다.

서울에는 일자리도 많고 돈도 더 많이 벌수 있다며 몇 해 전 홀로 부산에서 올라와 고시원에서 지내다, 최근 작지만 월셋방을 구해 가족과 함께 살고 있는 선배는 내가 봐도 열심히 산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고, 가끔 예고도 없이 주말에 나가서 일해야 하지만 부산에서 일할 때보다 벌이가 좋다며 ‘서울 오길 잘했다’고 말하는 선배다.

<font color="#A341B1"> 부모의 고통이 대물림되는 사회</font>

“야, 내 인생은 왜 제자리에서만 맴도는 것 같으냐. 좀 나아질 때도 됐구먼, 사는 거 진짜 팍팍하다.”

언젠가 그 선배가 혼잣말 하듯 하는 소리에 난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우리 같은 사람은 제자리를 지키며 사는 것만도 죽을힘을 다해야 가능한 일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선배의 성실함과 고단함에 비례해서 선배의 인생도 반짝여주면 좋겠지만, 노동의 대가가 정직하게 돌아오지 않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건 선배나 나나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 선배의 지갑에 월요일이면 부적처럼 고이 접히는 로또복권을 보며 ‘성실히 살 생각은 하지 않고, 왜 이리 허황된 꿈을 꾸냐’고 탓하지 못하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그것이 꼭 인생 역전되는 한 방의 꿈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신바람 날 일 없는 월급쟁이 노동자의 일상에 소소한 재미가 돼준다면 그리 나쁘지 않을 듯 보였다. 그 선배에게는 내일이면 출근할 수 있는 일터라도 있고, 저녁이면 돌아가 저녁상에 마주 앉을 가족이 있고, 또 어린이날이라고 선물을 사줄 여유 정도는 있으니 그나마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어느 신문에서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의 아이들이 어린이날에 가장 받고 싶어 하는 선물이 ‘아빠’라는 기사를 읽었다. 아빠는 77일간의 파업과 그 파업이 끝나고도 길거리에서 또는 분향소에서 여전히 집으로 돌아올 줄 모르고, 엄마는 그런 아빠를 대신해 생계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사이 해고노동자의 아이들은 혼자 크고 자랐던 것이다. 아이들의 쓸쓸함이 얼마나 컸을까, 혹시라도 부모의 우울과 불안이 아이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 건 아닐까,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지난해 한진중공업 노동자의 아이들은 파업 현장을 떠나지 못하는 아빠를 보려고 주말이면 공장으로 찾아왔다. 놀이가 될 만한 것 하나 없는 그 삭막한 공장 안에서 아이들의 표정은 다행스럽게도 밝아 보였다. 공장 안에서 아이들은 아빠와 자전거를 타기도 하고, 85호 크레인 밑에서 그림을 그리고 놀다가 크레인 위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에게서 과자를 내려받아 먹기도 했다. 그러다 저녁이 되면 엄마 손에 잡혀 밥을 먹고, 공장 안에서 잠을 잤다. 그렇게 아이들이 오는 날은 파업 중인 공장 안이 작은 집인 듯 착각이 들 정도로 포근했다. 가족은 함께 있을 때 힘이 나고, 위로가 되고, 행복을 느낀다는 것을 그들을 보며 새삼 깨달았다. 그이들은 이번 5월을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

<font color="#A341B1"> 불안정 노동, 불안정 가족</font>

5월이 ‘가정의 달’이란 말을 들을 때면 묘한 이질감을 느끼게 된다. 어린이날이며 어버이날이라 정해놓고 달력에 빨간색으로 색칠만 해놓는다고 가정의 달이 되나. 일을 하면서도 가난에 허덕이는 사람, 오늘 잘릴까 내일 잘릴까 불안한 사람, 이런 불안정한 삶 속에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사람. 그들이 감히 가정을 꾸릴 마음이나마 품을 수 있을까. 현실은 가족을 만들기에도, 그 가족을 지키기에도 버거운 사회다. 누구나 평범한 일상에서 어느 날 갑자기 투쟁의 일상으로 변해버릴 수 있는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 국가의 의무에 대해 따지는 일은 차치하고서라도, 최소한 스스로 살아보려 애쓰는 노동자들의 목을 꺾으며 생존의 터전을 빼앗지는 말아야 한다. 가족의 의미를 다시 돌아보고, 내 가족뿐만 아니라 소외된 이웃에게도 관심을 가져보며 마음을 나누고, 휴식으로 재충전을 할 수 있는 여유를 누려보는 건 우리에게는 과연 호사스러운 일인가.




민주노총 부산본부 상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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