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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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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는 사람을 구분하지 않는다

부제: 폭력을 묵인한 이들이 다시 폭력에 노출되는 위험 사회
구럼비, 한진중, SJM… 그들의 일이 아니라 우리의 위기다
등록 2012-08-25 06:05 수정 2020-05-02 19:26
문정현 신부(맨 앞줄 모자 쓴 이)가 지난 3월7일, ‘구럼비 발파’ 소식을 듣고 달려온 정치인들과 함께 규탄 집회를 하고 있다. 문 신부는 대추리, 용산, 강정 등 우리 사회에 탄압의 ‘소나기’가 내리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함께 해왔다. 한겨레 류우종

문정현 신부(맨 앞줄 모자 쓴 이)가 지난 3월7일, ‘구럼비 발파’ 소식을 듣고 달려온 정치인들과 함께 규탄 집회를 하고 있다. 문 신부는 대추리, 용산, 강정 등 우리 사회에 탄압의 ‘소나기’가 내리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함께 해왔다. 한겨레 류우종

매주 수요일은 한진중공업 촛불문화제가 있는 날이다. 부산 영도구의 한진중공업에서 집까지 가려면 버스를 타고 다시 지하철을 갈아타야 하는, 1시간가량이 소요되는 다소 먼 거리다. 그래서 늘 문화제를 마치고 집에 도착하면 밤 10시가 훌쩍 넘는다. 그날은 시와 음악이 있는 문화제로 꾸려져 평소 문화제보다 다소 늦게 마쳤다. 늦은 시간의 지하철은 늘 그렇듯이, 술에 취한 사람, 삶에 지친 사람들로 만원이다.

지하철 자리에 앉지 않던 노동자

지하철이 시내 중심가를 벗어나자 사람들이 하나둘 내려 지하철 안에는 제법 빈자리가 많이 보였다. 그런데 빈자리가 많이 있는데도 내리는 문 옆 기둥에 기대어 앉지 않고 가는 이가 보였다. 한 달 전쯤에도 그 시간, 그 자리, 그 차림새로 서 있던 그를 나는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시멘트 가루가 잔뜩 묻은 플라스틱통, 어디에 쓰는 연장인지 끌개·망치·빗자루 등이 마구잡이로 들어가 있는 마대, 그리고 땀과 흙, 기름 따위가 한데 엉켜 묻은 옷. 한눈에 봐도 남루하고, 보는 사람조차 그 사람의 피곤함이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였다. 처음엔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자세히 보니 말아올린 머리가 검은 모자 속에 쏙 들어가 있었다.

‘길 닦는 사람인가, 다리 아플 텐데 앉지도 않고….’

자리 있으니 앉으란 소리를 할까 말까, 입술만 달싹거리다가 지하철이 역사에 몇 번이나 서는 동안 나는 끝내 그 얘기를 하지 못했고, 그 노동자는 나보다 한 정거장 앞에 내렸다. 그가 내리자 안쓰럽게 바라보던 중년의 아저씨가 말했다. “옷이 더러워 안 앉는 것 같네. 뭐라고 할 사람 아무도 없는데….”

한 달 전 그 여성 노동자를 보며 느꼈던 안쓰러움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그날은 혼자가 아니었다. 중학생쯤 돼 보이는 딸과 함께였다. 윤기 나는 밤갈색 머리는 하나로 묶어 올렸고, 반바지와 티셔츠 차림의 아이는 수수했지만 반듯하고 정갈해 보였다. 반질반질 참 예쁜 아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저 아이를 저렇게 먹이고 입히고 하느라 저 여성 노동자는 이리 밤늦은 시간까지 일하고, 땀과 먼지에 찌든 옷 때문에 빈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귀가하는 구나.’

소곤소곤 얘기하다 틈틈이 웃기도 하던 두 모녀를 바라보다 문득 불안해졌다. 연일 이어지는 살인사건 보도와 노동자들의 파업 현장에 들이닥친 용역깡패들의 폭력으로 붉은 피를 쏟아내는 모습을 접한 순전히 내 기분 탓이었겠지만, 여성 노동자로, 또 어린아이로 살아가기에는 우리 사회가 너무나 불안하고 위험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는 강력범죄에 사람들은 경악했고, ‘사회가 미쳐가고 있나, 사람이 어쩜 저럴 수 있나, 사람이 아니라 괴물이라’는 식의 성토가 이어지고 있다. 그러면서 점점 잔인해지고 무차별적인 범죄 대상에 자신이 되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하지만 그런 괴물을 만들어낸 것은 바로 우리 사회이고, 이 사회가 변화하지 않는 한 우리는 불안과 불행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허공에 매달린 십자가도 구원하지 못하네’

사회와 제도, 정치, 권력과 정권에 의해 저질러지는 폭력과 살인은 더욱 광범위하고 교묘하다. 그것은 때론 정의와 법, 질서 수호라는 포장을 덮어쓰고 정당화된다. 그것을 지켜보는 대중은 잘 포장된 폭력과 사회적 살인을 묵인하거나, 스스로 무뎌지고 외면하고 말았다.

언젠가 한진 노동자들의 천막농성장에 둘러앉아 가벼운 농담을 건네며 시간을 보내던 때였다. 한진 노동자 한 분이 문득 “어떤 노동가요 가사에 이런 게 있더라고…. 제목은 뭔지 모르겠고, 가사가 이래. 허공에 매달린 십자가도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네…. 당시 용역들한테 두들겨 맞고 공장 밖에 쫒겨나 있을 때였는데…. 하필 그때 그 노래를 들었는데 기분이 이상하대. 어, 신부님이 계셨네…” 하며 겸연쩍게 웃으셨다.

같은 자리에 동석한 신부님은 그저 “죄송스럽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평생직장인 줄로만 알고 다니던 회사에서 하루아침에 해고되고, 그 일자리 하나 지켜보겠다고 맨몸으로 버티던 그들에게 아들뻘 되는 어린 용역들에게 듣는 것만으로도 수치스러운 갖은 욕설과 폭력으로 멍들던 사람들. 그리고 길바닥에 쫓겨난 그들에게 빨갱이며 폭도라고 딱지 붙이던 언론과 정권. 믿지도 않는 하느님까지 타령하며 매달리고 싶었을 그들의 절박한 심정이 느껴져 가슴이 아팠다.

폭력의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 하지만 그들의 손을 잡아줄 곳 없는 암담한 현실. 정작 미안해야 할 사람은 따로 있는데, 이 폭력의 시대를 끝낼 수 있는 힘은 다른 곳에 있는데 이 힘없고 여린 사람들은 저들끼리 서로 미안하다, 괜찮다며 다독이고 있다. 그들이 사는 세상은 대체 어떤 세상인 걸까?

고작 50여 명의 노동자를 몰아내려고 버스 4대에 쇠파이프와 곤봉으로 무장한 용역들을 싣고 와 무자비하게 폭력을 휘두르던 새벽, 자동차부품생산업체 SJM의 노동자들은 머리가 깨지고 입술이 찢어지는 폭력을, 동료들의 절규와 피가 공장을 적시던 공포를 고스란히 견뎌야 했다. 그 잔인한 폭력을 휘두르던 용역은 인터넷 방송을 통해 “사람은 맞아야 해”라고 태연하게 웃으며 말하는 잔인한 시대다.

‘구럼비’라는 예쁜 이름에 현혹돼 일개 바위를 생명이 있는 것처럼 미화하지 말라던 정치인. 하지만 그 정치인에게는 하나의 돌덩이에 불과한 바위를, 그 바위 안에서 살아왔고, 살고 있고, 또 앞으로도 살아가야 할 많은 생명과 제주 강정마을 주민의 삶을 지키려고 싸우던 문정현 신부님. 군홧발에 짓밟힌 성체를 부여잡은 채 엎드린 늙은 사제의 눈물 앞에서도 웃으며 조롱하는 경찰. 그리고 침묵하는 언론, 교황청. 참혹한 시대다.

총과 탱크를 앞세워 정권을 잡고 민중의 피로 그 정권을 이어가던 독재가의 딸이 어떠한 반성과 사죄도 없이 ‘과거’를 운운하며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대선에 나오는 염치없는 시대다. 여리지만 염치와 양심을 가진 이들, 게다가 영혼까지 가진 이들이 살기에는 참으로 힘든 세상이다.

 우리의 관용은 도대체 어디까지인가 

폭력은 폭력을 낳고, 그 폭력을 묵인하던 이들은 다시 더 큰 폭력에 노출된다. 영화 에서 어느 활동가가 하던 말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서울 용산 참사에 침묵했던 우리는 그들에게 더 큰 폭력을 허용했으며, 그들로 하여금 폭력의 자신감까지 심어주었다. 우리의 관용은 대체 어디까지인지 궁금하다던 그 말. 나 또한 궁금하다.

지금 우리의 관용이 과연 늦은 밤 함께 귀가하던 모녀의 평범한 일상을 끝까지 지켜줄 수 있을까, 해고된 노동자들의 일터를 찾아줄 수 있을까. 그리고 과연 우리 일상은 지켜낼 수 있는 건가. 길을 걷다 소나기를 만나듯이, 일상이 깨지는 일은 너무나 순간이고,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그리고 그 소나기는 사람을 구분하지 않는다.

민주노총 부산본부 상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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