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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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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에서 부끄러움을 배우다

등록 2012-09-07 20:08 수정 2020-05-03 04:26

가끔 잠이 오지 않거나 새벽에 잠이 깨는 날이면 참으로 난감하다.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라 그런지 난데없이 깬 잠에 당황하거나 불안해진다. 그런 날은 침대 옆 창으로 보이는 야경을 구경한다. 형형색색의 네온사인과 빠르게 지나가는 차량의 불빛으로 아직 ‘잠들지 않은 도시’를 보면 조금은 위안이 되기도 한다. 뭐든 빠르게 변화하고 높디높은 건물들이 경쟁하듯 들어서고 화려하고 세련된 온갖 물질로 넘쳐나는 도시지만, 그럴수록 사람은 점점 더 바빠지고 외로워지는 것 같다.

예쁜 옷, 맛있는 음식 사주고 싶었지만
캄보디아를 다녀온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하지만 여전히 시계를 볼 때마다 캄보디아에 두고 온 아이들과 그곳의 하늘과 강, 끝없이 펼쳐지던 평원의 시간을 함께 세본다. 그곳에 있는 동안 비록 몸은 고되고 불편했지만, 마음은 한없이 평안하고 또 평화로웠던 것 같다.
캄보디아를 처음 방문한 건 3년 전이다. 우연한 기회에 아시아평화인권연대에서 진행하는 캄보디아의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한 장학사업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인연이 돼서 처음으로 캄보디아를 방문하게 되었다. 캄보디아는 세계에서 가난한 나라 중 하나로 전체 인구의 40~45%가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생활한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않고 돈을 벌러 다니는 경우가 많고 그만큼 문맹률이 높다. 예전 우리나라 역시 가난하던 시절, ‘공부가 밥 먹여주냐’는 어른들의 핀잔과 강요에 떠밀려 도시에서 ‘공순이’ ‘공돌이’로 살아간 우리네 부모님들과 다르지 않아 보였다. 어쩌면 그들의 처지에서 글을 읽고 쓰는 것보다, 당장 배를 곯지 않고 병들지 않는 것이 더 절박한 일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네댓 살 어린아이들까지 생계 전선에 뛰어들어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아이들의 미래 또한 그 가난에 담보 잡혀 조금도 나아지질 않았다. 적어도 아이들이 가난 때문에 자신의 꿈까지 포기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 후원을 시작하게 되었다. 자신의 미래를 계획하고 선택할 기회만이라도 만들어주고 싶었다. 장학사업으로 결연을 맺은 아이들은 학교에 다닐 수도 있고, 적은 양이지만 아이들의 가정에 쌀과 생필품 등이 지원되기도 한다. 이렇게 장학사업의 혜택을 보는 아이들은 그나마 선택받은 아이다.

황이라(맨 왼쪽)씨가 캄보디아에서 만난 어린이들. 물질적 풍요는 없었지만 아름다운 자연과 평화로운 마을에서 사는 아이들의 눈빛에는 사람에 대한 호의가 있었다. 황이라 제공

황이라(맨 왼쪽)씨가 캄보디아에서 만난 어린이들. 물질적 풍요는 없었지만 아름다운 자연과 평화로운 마을에서 사는 아이들의 눈빛에는 사람에 대한 호의가 있었다. 황이라 제공

캄보디아에서 만난 아이들 대부분이 또래 한국 아이들에 비해 키가 작고 마르고 발육이 한참이나 느렸다. 그 뙤약볕에 어디서 얻었는지 겨울 털옷을 껴입고는 땀을 뻘뻘 흘리며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무언가를 팔거나 구걸하는 아이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일찍 철들기도 했다. 캄보디아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산다는 톨레삽 호수의 수상가옥에서 만난 아이들도 관광객을 나르는 보트를 운전하고, 음료수를 팔고, 고기를 잡고 그것을 내다 팔았다. 앙코르와트에서 만난 아이들은 그 가느다란 팔목에 팔찌며 온갖 장신구를 걸고 나와서는 애타는 눈빛으로 ‘원달러’를 외쳐댔다. 더위를 못 이겨 코코넛주스를 사먹는 우리 일행의 주변을 에워싸며 익숙한 한국말로 “이거 예뻐, 좋아” 하던 아이들. 콧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아이를 보면 정말이지 ‘원달러’가 아니라 ‘십달러’라도 쥐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자, 이 돈 받고 집에 가거라. 가는 길에 코코넛주스도 사고 빵도 사서 오늘 하루라도 배부르게 먹거라” 하고 말하고 싶었다.

사실 처음 캄보디아의 아이들을 만나고 나서는, 단 며칠이라도 이 아이들에게 새로운 세상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울퉁불퉁하고 비가 오면 발이 빠져 신발을 들고 맨발로 걸어가야 하는 흙길이 아닌 잘 포장되고 깨끗한 도로를 보여주고 싶었고, 온갖 벌레며 모기가 득실대고 올라서면 곧 무너질 듯한 집이 아니라 밝은 햇살이 들어오는 창이 있는 넓고 쾌적한 집이 있다는 걸, 그리고 그 지저분한 몸을 향기 나는 비누로 씻기고 로션을 발라주고 예쁜 옷을 입혀 근사한 곳에 가서 맛있는 음식을 사먹이고도 싶었다.

‘스트레스’ 모르고, ‘괜찮냐’ 묻는 아이들

그러면서 앙코르 문명 ‘1천 년의 신화’는 온데간데없이 이방인들로 넘쳐나고 그렇게 많은 관광객들에게서 벌어들인 돈은 어디에 쓰고 이들은 왜 이리 가난한 것일까 생각했다. 늘 ‘괜찮아요, 참으면 돼요’ 하는 그들의 미련스러울 만큼 순박한 눈에 세상이 얼마나 편리한 것들로 넘쳐나고 풍족한지 ‘당신들은 전혀 괜찮지 않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함께 동행한 스태프의 ‘그들을 우리 잣대로 보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그들과 그들의 삶을 봐달라’는 말은 나를 오래도록 생각하게 했다. 우리 감정대로 동정하듯 돈을 주는 것이 과연 그 아이들을 위한 일인지, 아이들이 어디에 있는 것이 가장 행복한지, 우리가 그들을 일시적인 연민의 감정으로 대하는 게 아니라 지속 가능한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 그들에게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캄보디아 아이들은 우리가 보기엔 턱없이 부족하고 불안한 환경에서도 서로 도와주고 의지하고 살뜰히 챙겨가며 살아가고 있었다. 아이들은 티 없이 맑고 여유와 따뜻함이 있었고, 그리고 평화로워 보였다.

‘공부하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느냐’는 나의 물음에 아이들은 ‘스트레스’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고, 변변치 않은 의복으로 인해 긁히고 파인 상처투성이의 손이며 발을 지녔으면서도 정작 내 다리에 난 작은 상처를 보고 아이들은 ‘괜찮으냐, 아프지 않냐’며 모여들어 걱정했다. 이런 환경에서도 희망이나 꿈이란 게 있을까 싶어 쉽게 물어보지 못하는 내게 ‘장래 희망이 선생님’이라고 말하는 밝은 아이들이었다. 그런 아이들을 보며 그들보다 훨씬 많이 배우고 좋은 걸 먹고 입은 내가 오히려 더 유약하고 빈곤하고 불행해 보였다.

지금도 이 화려한 도시의 불빛 속에서 나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다는 캄보디아를 생각하니까 말이다. 내 머리 위로 무수히 박힌 별들이 당장이라도 쏟아져내릴 것 같던 타헨 마을의 밤하늘, 끝없이 펼쳐지는 평야 위로 쌓아올린 아이스크림콘 같던 구름과 하늘. 메콩강이 만들어내는 황톳빛의 강물이 마치 바닷물처럼 넘실대던 톨레삽 호수. 온통 흙빛의 물밖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집을 짓고 고기를 잡고 물건을 팔며 생활을 이어가던 사람들. 그리고 모든 비밀스런 말까지 쏟아내고 싶을 만큼 맑고 순박한 아이들의 눈망울이 지금도 아련하게, 또 사무치게 그립다. 잠깐이지만 아이들에게 도시의 화려하고 풍족한 생활을 보여주고 싶어 했던 나의 천박한 사고가 두고두고 부끄럽다.

보기에는 그럴듯한 이 나라는 실은 너무나 삭막하고, 잔인하고, 폭력적이다. 한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가 22명이나 죽어가는 나라, 그럼에도 어느 누구 하나 책임지는 이 없는 나라, 함께 살자는 노동자들을 용역깡패를 동원해 복날의 개 잡듯이 패는 나라, 노동자들의 집회에는 득달같이 달려오던 경찰이 어린아이·여성의 안전과 생명 하나를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는 치안에 무능한 나라, 노동에 소외된 어느 청년의 절망이 ‘이럴 바에 함께 죽자’는 칼날로 돌아오는 나라, 그럼에도 그들의 절망과 불안·외로움을 외면하는 나라. 가난한 캄보디아인들이 불쌍한 것이 아니라, 물질의 풍요 속에서도 늘 빈곤과 상대적 박탈감에 허덕이는 우리가 더 가엽다.

다음에 꼭 전하고 싶은 소식

첫해 아이들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다음번 다시 올 때는 아이들의 마을에 길이 닦여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번 아이들을 보러 가는 길엔 내 나라에 대해 자랑스럽게 얘기할 수 있는 일이 많이 생겼으면 한다.

캄보디아 아이들에게 일터에서 쫓겨났던 노동자들이 일터로 돌아갔다는 소식, 부서지고 파헤쳐진 산과 바다가 다시 자연으로 돌아갔다는 소식, 사람이 존중받는 사회로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싶다. 그래서 이것이 내가 사는 나라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민주노총 부산본부 상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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