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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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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 체불 권하는 사회

19만명 노동자 체불임금 7900억원, 사업주 처벌은 솜방망이

벌금형이 체불임금 10% 불과하고, 노동부는 이들을 귀찮아해
등록 2012-10-13 14:35 수정 2020-05-03 04:26

추석을 앞둔 지난 9월29일, 전남 순천시 공사 현장 10m 높이 철구조물에서 40대 남성이 “밀린 임금을 달라”며 자살 소동을 벌였다는 뉴스를 보았다. 남성은 주변의 설득으로 무사히 내려오긴 했으나, 추석을 앞두고 오죽이나 답답했으면 그랬을까 싶은 생각에 마음이 씁쓸해졌다.
최근 내가 있는 노동상담소로 지역 언론사로부터 추석 연휴를 맞아 뉴스거리가 될 만한 체불임금 사례가 있는지 취재를 요청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사실 해마다 추석 연휴 즈음해 이런 취재 요청은 종종 있어왔고, 실제로 언론의 보도 등으로 장기 임금체불 사건이 해결되거나 임금체불로 고민하던 노동자들이 상담소를 찾아와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임금체불 등과 같은 노동현장의 문제는 특정 시기만이 아니라 늘 언제, 어디서나 발생한다.

‘지불능력’보다는 ‘의지’의 문제
임금이 체불된 노동자는 지난 9월 말 현재 총 19만 명으로 금액은 7900억원에 달한다. 가늠조차 안 되는 금액이지만, 임금체불 당사자에게는 당장의 생계를 위한 절박한 돈이자 자신의 땀과 바꾼 아까운 돈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돈을 사업주는 일말의 책임이나 가책도 없이 늦게 주거나 떼먹는다.
물론 실제로 회사 사정이 어렵거나 지불 능력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회사 사정이 어렵더라도 어떤 것을 먼저 집행할 것인가의 우선순위의 문제인 경우가 더욱 많다는 점이다. 내가 상담을 하며 본 사례들 또한 80% 이상이 사업주의 지불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의식’과 ‘의지’의 문제인 경우였다. 상담을 오는 노동자들은 상담 끝에 꼭 “우리 회사가 진짜 어렵다. 내가 돈을 받을 수 있을까”라고 물어본다.
그래도 한때 한솥밥을 먹던 가족이라고 그 와중에도 사업주를 걱정하는 노동자의 마음과 달리, 진짜 어렵다던 회사는 아무 문제 없이 잘 돌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어떤 회사는 노동자들 앞에서는 울고 짜는 소리를 해대며, 상습적으로 임금을 체불하고 심지어 퇴직금까지 주지 않고 해고하기도 했다. 가끔 현금이 원활하게 융통되지 않거나 원청에서 납품대금을 늦게 받아 임금 지급이 얼마간 지연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사업주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우리 사업장에서는 임금을 체불하지 않겠다’는 의지만 가지고 있어도 임금체불은 많이 줄어들 것이다.
임금체불로 노동부에 가서 조사를 받아본 사람은 알겠지만, 오히려 사업주가 더 당당하다. 그도 그럴 것이 노동사건은 대부분 약식 기소되고 벌금형에 처해진다. 이때 벌금은 임금체불의 경우 체불 임금의 10% 정도로 아주 적은 금액이다. 그리고 최근 몇 년간 악질 체불 사업주 구속 현황을 보면 2009년 2명, 2011년 13명, 2012년 8월 기준 12명에 불과하다.
그러다 보니 사업주는 임금체불을 너무나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임금체불로 노동부에 가게 되더라도 자신이 재수 없어 걸렸다고 생각하거나 오히려 그것을 신고한 노동자를 괘씸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간혹 어떤 사업주는 차라리 벌금을 내면 냈지, 임금은 못 주겠다고 버티기도 한다.

경비원 할아버지가 근로기준법을 공부한 이유
사업주들의 이런 몰염치하고 몰상식함에 이어 노동자들을 더 힘들게 하는 것은 바로 고용노동부다.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던 한 아저씨가 지난 4월 퇴직을 했다. 24시간 격일제 근무를 하면서도 최저임금에 못 미치는 임금을 받았던 아저씨는 지난 5월 최저임금 위반에 따른 임금체불을 이유로 노동부에 진정을 했다. 대부분의 노동자가 그렇지만 아저씨 또한 일하는 동안 이런 일로 노동부에 불려가고 하면 얼굴이 받쳐 일하기도 껄끄럽고, 또 혹시라도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이유로 미루다 퇴직을 한 뒤에야 노동부에 진정을 넣을 수 있었다.
그런데 진정을 하고도 일이 해결되지 않자 아저씨는 지난 7월 다시 고소장을 제출했지만 10월인 오늘까지도 해결되지 못한 것이다. 답답한 나머지 상담소를 찾은 아저씨는 근로기준법은 어디서 배우셨는지 자신의 임금체불 내역을 상세히 계산해오셨다. 연세도 꽤 있어 보이는 분의 입에서 ‘근로기준법’이라는 말을 들으니 신기하기도 하여 “아니, 어떻게 임금 계산까지 이렇게 손수 해오셨어요? 계산하기 힘드셨을 텐데” 했더니 “내가 하도 답답해서 혼자 공부했어요. 책에 보니까 나 같은 감시단속근로자는 최저임금도 다 못 받는다길래 내가 90%만 계산했는데, 한번 봐볼랍니까” 하고는 공책을 내밀어 보이셨다. 공책에는 그간 아저씨가 근무했던 날짜별로 근무시간·근무내용과 함께 최저임금 감액 적용분으로 계산된 임금내역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아저씨가 말씀하시는 감시단속근로자란, 근로가 간헐적으로 이루어지고 비교적 피로도가 적은 업무를 하는 노동자를 말한다. 대표적인 직종 중 하나가 경비직이다. 하지만 경비직이라 해서 모두가 감시단속근로자는 아니다. 사업주가 노동부로부터 감시단속 승인을 받아야 최저임금의 10%를 감액 적용할 수 있지만, 이 아저씨의 경우는 확인해보니 감시단속 승인을 받지 않은 사업장이었다.
이렇게 노동부의 근로감독관이 해야 할 업무를 ‘근로기준법’이라고는 그동안 듣도 보도 못한 노동자가 스스로 배워 찾아갔지만 근로감독관이 정작 하는 말은 “24시간 동안 일을 하는 게 가능하냐. 중간에 휴식하거나 잠자는 시간이 있는 거 아니냐”라더란다. 그러자 아저씨는 이번에는 자신이 24시간 동안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구체적으로 열거해 적어가셨단다.
“내가 일하는 아파트에 한 번만 와봐도 알아요. 근데 아쉬운 놈이 우물 판다고….” 그런데 이렇게까지 해봤지만 이제는 피고소인들이 출석이 늦어져서 사건 조사가 지연되고 있다며, 봄에 접수된 사건이 추석을 지나고도 해결되지 않으니 아저씨의 속이 얼마나 타셨을까. “이러다가 내 사건이 없어지는 건 아니겠지요? 노동부에서 하도 연락이 없어 답답해서 여길 다 찾아와봤네” 하신다.

“최소한 우리 얘기도 좀 들어봐야”
하지만 실제로 노동부에서 이런 식으로 사건을 지연시키는 일은 허다하고, 어떤 경우는 민원 접수 자체를 하지 않기도 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어렵게 찾아간 노동부 민원실에서 ‘민원인 상담’이라는 이름으로 상담을 하며 적극적으로 얘기를 들어주기는커녕 “법 위반 사항이 아니다” “입증 자료를 가지고 와라” “이건 여기서 하는 게 아니다”라는 식으로 노동자를 돌려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또 노동부는 ‘임금체불제로시스템’이라는 이름으로 사전조사보다는 합의나 화해를 종용하며 “어차피 못 받을 거니 이 정도로 해결하자”는 말로 노동자들로 하여금 사건을 미리 포기하게 만들어버리기도 했다.
어느 노동자가 한 말이 아직도 생각난다. “아니, 누가 우리 편 들어달래. 최소한 우리 얘기도 좀 들어봐야 할 것 아냐.”
임금 떼먹는 걸 제 입술에 묻은 밥풀 떼먹듯 쉽게도 하는 사업주에, 마치 자신이 사업주인 것처럼 자신들에게 밀린 임금 받으러 온 귀찮은 사람 취급하는 노동부에, 이래저래 힘든 노동자들이다. 임금체불에 대한 사업주의 책임과 사후 처벌도 강화해야겠지만, 노동부 또한 객관적이고 공정한 자세로 노동자들의 어렵고 안타까운 처지를 살뜰히 살필 수 있도록 제 역할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민주노총 부산본부 상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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