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넌 결혼하지 마”

결혼과 임신이 겹쳐 정리해고 당할 위기의 친구

국민행복시대 열겠다는 여성 대통령이 부디 현실 바꾸길
등록 2012-12-28 11:51 수정 2020-05-03 04:27

얼마 전 나의 오랜 친구가 결혼을 했다. 오 랫동안 교제하던 연인과의 결실이기도 했 고, 점점 나이가 차는 딸의 결혼을 걱정하던 아버지가 최근 간암 판정을 받은 상황에서 치르는 결혼식이라 친구에게는 좀더 남다른 터였다. 아침 일찍부터 서두른 덕에 여유 있 게 결혼식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편에 마 련된 의자에 앉아 하객을 맞는 틈틈이 웨딩 촬영을 하는 친구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 칠 때마다 쑥스러운 듯이 웃던 친구는, 하객 이 없는 한가한 틈을 타 내게 손짓을 했다. 냉큼 친구 곁으로 다가가 친구의 하얀 드레 스 귀퉁이를 끌어다 내 무릎 위에다 걸쳐보 았다. 그런 나를 바라보던 친구가 뜻밖의 말 을 던졌다.
친구의 불안한 결혼식 그리고
“넌 결혼하지 마.” “응? 뭐?”
새 신부가, 그것도 결혼식 당일에 할 소리 는 아닌 듯싶어 나는 너무 놀랐다.
“우리 회사 구조조정 한대. 어제 전체 직 원들 면담 있었는데 난 결혼식 준비한다고 가지도 못했고, 다음주에 명단 발표된다는 데 신혼여행도 불안해서 못 가겠어.”

여성 대통령은 나왔지만, 여성 노동자의 현실은 처참하다. 결혼식장에서도 정리해고 위협에 떠는 신부들이 있다. 서울의 한 예식장 모습. 한겨레 박승화 기자

여성 대통령은 나왔지만, 여성 노동자의 현실은 처참하다. 결혼식장에서도 정리해고 위협에 떠는 신부들이 있다. 서울의 한 예식장 모습. 한겨레 박승화 기자

친구가 다니는 회사는 인테리어 전문회사 로, 동종 업계에서는 나름대로 인지도도 있 고 영업 실적도 꽤 좋은 회사라고 했다. 그런 데 최근 경기 한파로 건설업계의 불황이 장 기적으로 이어지다 보니 친구의 회사도 어 려워진 모양이었다. 전체 직원이 200명가량 인데 그중에서 절반이 훨씬 넘는 120여 명 을 해고하겠다고 했단다. 해고 기준은 결혼 한 여성, 임신한 여성이 우선순위에 속한다 고 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내 친구는 그 두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하고도 남았다. 사실 친구는 임신 중이었다. 내가 하는 일이 떼인 돈 받아주고 잘린 사람 도와주는 일이긴 하 지만, 이번만큼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조금 기다려보자. 신혼여행이라도 갔다 와서 천천히 얘기하자”며 다독거리는 게 전부였다. 친구는 그렇게 불안스런 결혼 식을 치렀다.

그리고 일주일 뒤,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 다. 신혼여행을 다녀오자마자 면담을 했다 는 친구는, 역시 결과가 좋지 않았다. “이제 어떡하면 좋겠느냐”는 친구에게 나는 “회사 가 정말 어려운 것 같긴 하냐”고 물어보았다. 사실 회사가 경영상 어려움으로 정리해고를 하더라도, 말로만 어렵다고 해서 무작정 해 고할 수는 없다. 특히 전체 직원의 절반 이 상을 해고할 때는 경영상 어려움을 객관적 으로 입증해야 할 뿐만 아니라 정리해고 계 획서를 노동부에 제출해야 한다. 그런데 친 구의 회사는 그 두 가지 요건을 다 충족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회사 스스로 얘기 하는 해고 기준 또한 너무나 말도 안 되는 것 들이었다.

부단한 노력이 수포가 되지 않길

나는 늘 그러하듯이, 법이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선에서 열심히 설명해주었다. 하지만 내 얘기가 친구에게는 별로 도움이 되지 못 했나 보다. 전화기 너머로 길고 깊은 한숨 소 리만 몇 번 들리는가 싶더니 “임신 하나로 모 든 게 바뀌었어”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친구 의 마지막 말이 너무나 쓸쓸하고 공허하게 들렸다. 전화기를 내려놓고도 한동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결혼과 임신은 분명 축 복받아야 할 일인데도 현실은 그렇지 못했 다. 내가 괜스레 미안해졌다. 아직 태어나지 도 않은 친구의 뱃속 아기에게 말이다. 또 결 혼과 출산이 마치 뭔가를 포기하고 이루게 되는, 큰 결심이 필요한 선택 같은 것이 돼버 린 듯해 씁쓸했다. 모든 사람이 그렇진 않다 라고 할 순 있겠지만 적어도 내 친구에게는 그랬다.

지방에서 2년제 대학을 나온 친구는 대학 졸업과 동시에 취업을 했다. 남들은 어려운 취업난에 수월하게 했다 하지만, 사실 간판만 인테리어 회사지 사장과 단둘이 있는, 사무실 하나 변변치 않은 회사가 내 친구의 첫 직장이었다. 그래도 친구는 밑바닥부터 배워서 차근차근 시작할 거라 했다. 전문대를 나와서 학벌이 밀려도 실력으로 싸워보겠다 했다. 지금 생각하니 그때 친구는 참으로 순진하고 또 용감했다. 한 달에 절반가량은 밤을 새워야 했고, 그 와중에도 틈틈이 학원까지 다니며 부지런을 떨며 살았다. 그 흔한 연애도, 여행도, 쇼핑도 친구에게는 유예된 미래였다. 그러다 어느 날 “이쪽 일은 아무래도 지방보다는 서울에서 자리잡는 게 더 좋을 것 같아. 배울 것도 많고, 기회도 많고”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그렇게 친구는 무작정 상경했다.

서울로 간 뒤 몇 년은 연락도 못하고 지냈다. 처음엔 적응하느라 바쁜가 보다 했고, 나중엔 일이 많은가 보다 했지만, 사실 친구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어느 늦은 밤, 술에 잔뜩 취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여기 서울엔 외국에서 공부하고 온 사람이 많아. 근데 나는….” 그 전화를 받고 나는 곧 친구가 다시 부산으로 내려오겠거니 했지만, 웬걸 친구는 오히려 더 꿋꿋하게 지냈다. 그렇게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온 친구였다. 그런 친구가 결혼과 임신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나 보다.

한 사람의 의지에 달렸다

우리나라 최초로 여성 대통령이 당선됐다고 언론에서는 난리다. 그리고 내 친구는 임신으로 인해 직장을 잃었다. 친구는 태어날 자신의 아이를 위해 이번에 투표를 했다고 했다. 나 역시 투표를 했다. 친구와 내가 원한 대통령은 아니었지만, 그 대통령은 지난 선거 기간에 많은 공약을 발표하고 또 많은 약속을 했다.

꼭 법이 저출산·고령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것은 의지의 문제라고 말했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이 한 약속은 꼭 지키는 사람이라 했다. 국민행복시대를 열겠다고 했다.

믿고 싶다. 그 사람이 약속했던 것들이 모두 지켜지길 바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쌍용자동차 국정조사, 반값 등록금,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이 꼭 그의 국민행복시대에 함께 실현되길 바란다. 이 모든 것은 그 한 사람의 의지에 달려 있다.

민주노총 부산본부 상담부장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