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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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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청소년인데요. 돈을 받을 수 있긴 있어요?”

등록 2012-08-09 16:49 수정 2020-05-03 04:26

날이 더워도 보통 더운 게 아니다. ‘사무실 에어컨 바람 밑에 있는 게 피서 중의 상피서’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밖에 나가는 일이 엄두조차 나지 않는 요즘이다. 지난 주말에는 체면을 고려해 최소한의 피복만을 걸친 채 거실 바닥에 손가락·발가락까지 벌려가며 누워 있어봤지만 더운 건 매한가지였다. 이래 더우나 저래 더우나 하는 생각에, 대충 옷을 주워 입고 밖으로 나갔다. 대학가 근처는 여름 땡볕에도 아랑곳없이 젊은이들로 넘쳐났다. 마땅히 갈 곳도, 꼭 사야 할 것도 없이, 사람들 속에 섞여 휘적휘적 걷다 보니 손에는 어느샌가 광고전단지가 수북이 들려 있었다.

“우리 반에 저 같은 애들 다 못 받는대요”
평소 같으면 받아들지 않았을 텐데, 그 더운 날 땡볕에 서서 전단을 돌리는 일이 너무 힘들어 보이기도 했고, 또 전단을 돌리는 아르바이트생이 대체적으로 고등학생쯤밖에 안 돼 보이는 어린 학생들이었다. ‘아, 방학이구나. 아르바이트하나 보네. 저러고 얼마나 받을까, 돈을 제대로 받기는 하나.’ 최근 청소년 아르바이트생이 부쩍 늘어났다. 얼마 전 신문에서 본 수치로는 10명에 3명꼴로 청소년이 아르바이트를 한다니 꽤 많은 수다. 방학 때가 되면 더 많은 학생들이 다양한 형태로 생애 첫 ‘노동’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 아이들에게 이 땅의 노동 현실, 노동자의 모습과 삶은 어떻게 체험될까?
2년 전쯤, 고등학교 3학년인 ㅇ을 민주노총 부산본부 상담소에서 처음 만났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활동을 하는 ㅇ의 담임선생님에게서 전화를 받은 건 그 학생을 만나기 며칠 전의 일이었다. “우리 아이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임금을 못 받은 것 같은데, 도움을 좀 받을 수 있을까요?” 청소년 아르바이트생의 경우 일을 하고 임금을 못 받거나 폭언·폭행을 당해도 그냥 당하거나 피해버리는 게 보통이다. 아직 어린 학생들이다 보니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거나, 교칙상 아르바이트를 제한하는 학교가 있어 주변 어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사업주들이 청소년을 고용해 일을 시키고도 손쉽게 임금을 떼먹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고, 최저임금을 위반하는 곳도 태반이다.
ㅇ도 그런 경우였다. 방과 후 식당에서 5개월간 서빙일을 한 ㅇ은 단 한 번도 임금을 받지 못했다. 그나마도 5개월 뒤 사장이 아예 가게 문을 닫고 사라져버려 혼자 말도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ㅇ의 사정을 안 담임선생님이 우리 상담소로 그 상황을 알려오신 것이다. ㅇ을 처음 만난 날, 담임선생님이 가보라 하니 별 기대 없이 억지로 찾아온 티가 온몸으로 느껴졌다. 상담소 문이 천근이나 되는 양 힘겹게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기본적인 상담을 위해 묻는 말에도 느릿느릿, 겨우 대답하는 정도였다.
그러더니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처음으로 내게 먼저 말을 건넸다. “근데요, 저 돈 받을 수 있긴 있어요? 우리 반에 저 같은 애들 많은데 다 못 받는대요.” 순간, 나는 내 상담 방식이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일방적으로 알고 싶은 것만 학생에게 몰아치듯 물어볼 게 아니라, 사장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그래서 왜 임금을 받아야 하는지, 이후 어떤 방법과 과정을 거쳐 임금을 받게 될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런 일들이 다소 불편하겠지만 단순히 받지 못한 아르바이트비를 돌려받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권리를 찾음으로써 같은 반 친구들의 권리도 함께 지킬 수 있는 것임을 다시 설명해야 했다.

청소년 임금 체불 문제는 2000년대 들어 꾸준히 제기돼 왔지만, 해결책을 모색하는 노동부와 교육부의 노력은 부족하다. 2008년 6월12일 '아동 청소년 노동 근절의 날'을 맞아 청소년노동인권네츠워크 회원이 서울 신림동에서 시위를 하고 있다. 박승화

청소년 임금 체불 문제는 2000년대 들어 꾸준히 제기돼 왔지만, 해결책을 모색하는 노동부와 교육부의 노력은 부족하다. 2008년 6월12일 '아동 청소년 노동 근절의 날'을 맞아 청소년노동인권네츠워크 회원이 서울 신림동에서 시위를 하고 있다. 박승화

임금체불에 심야노동, 어른들의 노동착취

ㅇ을 고용한 식당 주인의 경우 연소자를 고용하면 당연히 근로계약서를 서면 작성하고 교부했어야 함에도 아예 근로계약서 자체를 작성치 않았고, 야간근로를 시킬 수 없음에도 버젓이 심야노동까지 시켰으며, 부모의 동의도 받지 않았다. 근로기준법을 위반한 사항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학생은 조금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아 보였다. 그렇게 되면 “사장이 크게 처벌받게 되냐”고 물었다. 사장이라는 사람이 임금은 몇 달째 주지 않으면서 용돈 하라며 한 달에 5만원씩 주기도 하고, 밤늦게 마치는 날이면 한 번씩 택시 타고 가라며 차비를 줬단다. 그런데 학생은 그게 또 고마웠나 보다. 이런 아이를 어른들은 속이고 기만하고 끝내는 상처를 준다.

ㅇ의 의견을 받아 노동부에 체불임금 부분만 진정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업주가 이미 가게를 처분하고 종적을 감춘 뒤였다. 게다가 다른 곳에도 빚이 많아 사업주 명의로 된 재산에 이미 경매가 진행 중이거나 예정돼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서둘러 노동부에 체당금(퇴직한 노동자가 도산한 사업주에게 임금을 받지 못한 경우, 국가가 임금채권보장기금에서 대신 지급해주는 제도) 신청을 하고, 노동부로부터 체불금품확인원을 발급받아 민사소송을 진행했다. 이렇게 민사소송까지 가서야 6개월 만에 체불된 임금을 모두 받을 수 있었다.

ㅇ은 “이 돈을 대학 등록금에 보태려고요” 하며 쑥스러운 듯 웃으며 내게 고맙다고 했다. ㅇ이 아르바이트비를 받았다는 소문은 학생들 사이에서 빨리 돌았다. 그 뒤 한동안 상담소를 찾아오는 학생이 꽤 많았다. 많은 학생들을 상담하며 학생들이 내가 아는 것보다 훨씬 많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고, 노동 현장에서 아이들이 받는 처우와 인권은 형편없다는 것을 새삼 다시 느끼게 되었다. 어떤 학생은 미성년자임에도 꽤 늦은 심야 시간까지 야간노동을 하는가 하면, 청소년을 고용할 수 없는 유해·위험한 사업장임에도 고용되고, 심지어 술·담배 심부름을 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게다가 상담을 하고 노동부에 진정을 넣는 과정에 사업주가 학생에게 밀린 임금을 주겠다고 직접 받으러 오라고 부른 뒤 “왜 노동부에 신고하냐”며 학생에게 재떨이를 집어 던지는 일도 있었다. 민주노조 하나 만들고 지키기에도 피 터지게 어려운 세상에서 그보다 더 약하고 힘없는 청소년들의 노동인권이나 권리까지 지켜지길 바라는 건 진정 욕심인가? “이런 일 또 생기면 또 언니 찾아갈게요” 하고 배시시 웃는 학생들에게 나는 “한 번 경험해봤으니까 또 그런 일 당하면 안 되지” 하고 말했지만, 다행이다 싶었다. 그 아이들에게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찾을 수 있는 곳이 생겼다는 사실이, 그리고 그곳이 내가 몸담은 데라는 사실이 말이다.

노동법을 학교에서 가르치는 나라들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나라에서는 학교 교과목으로 노동법을 가르친단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입시 위주의 교육체계에서 노동법은커녕 윤리 교과조차 찬밥 신세가 돼버렸다. 영어 단어를 외우고 수학 문제를 잘 푸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들이 사회에 나와서 직접적으로 바로 경험해야 하는 것은 ‘노동’이다. 지금도 많은 학생들이 노동을 다양한 방법으로 경험하고 점점 보편화되고 있다.

이런 현실을 무시한 채 학교가 청소년 아르바이트를 무조건 교칙으로 제한하고 금지할 게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청소년 노동인권 및 간단한 노동법에 대한 교육을 하고, 나아가 스스로 권리를 찾고 지킬 수 있는 의식을 심어주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미래의 예비 노동자인 청소년들이 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게 된다면 자연스레 권리의식을 가질 것이고, 그들의 노동으로 세상이 움직이고 변화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좀더 자긍심을 가지고 그들의 ‘노동’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의 생각이 내일의 우리 가치관이 되고, 그들의 노동이 내일의 변화를 가져오며, 그들이 바로 우리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민주노총 부산본부 상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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