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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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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한때 해고자였다 아니. 지금도 해고자다

[황이라의 스머프 통신]부산지하철에서 해고당하고 아버지 수술 보증도 못 섰던 시절… 노동의 희망마저 빼앗는 세상, 제발 사람을 살게 하라
등록 2012-07-26 16:34 수정 2020-05-03 04:26
지난 6월19일 풍산마이크로텍 정리해고 노동자들이 충남 아산시 국도에서 정리해고와 재벌 특혜 철회를 요구하는 국토대장정을 하고 있다. 김태형 기자

지난 6월19일 풍산마이크로텍 정리해고 노동자들이 충남 아산시 국도에서 정리해고와 재벌 특혜 철회를 요구하는 국토대장정을 하고 있다. 김태형 기자

지하철을 타고 바라보는 아침 출근길 풍경은 다양하다. 피곤에 못 이겨 조는 사람, 책을 보는 사람, 음악을 듣는 사람, 휴대전화를 보는 사람. 그들 사이로 나는, 주로 멍하게 있거나 생각을 한다. 대개는 여행을 가는 즐거운 상상을 한다. 그러면 그날 하루가 기분 좋게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은 정말로 출근이 하기 싫었다. 그렇게 상상만 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어졌다. 지하철에서 내려 사무실까지 걸어가는 와중에도 갈까 말까를 수십 번은 더 생각했다. “아직도 안 늦었어, ‘쨀’ 수 있는 것도 용기야.”

1년에 하루도 빠짐없었던 투쟁

사무실을 눈앞에 두고서도 갈등은 계속됐다 그런데 순간 못 볼 것이라도 본 것처럼 얼굴이 뜨거워졌다. 부산시청 앞 천막농성 중인 풍산마이크로텍 해고노동자를 사무실 문 앞에서 맞닥뜨린 것이다. 전국 곳곳에서 해고돼 천막을 치거나 노숙을 하며 복직투쟁을 하는 사람들, 그들에게는 매일 아침 출근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그것이 그들이 얼마나 꿈꾸는 삶인지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순간 너무나 부끄러운 마음에 인사도 못 드리고 들어와버렸다. “용기 다 얼어 죽었다.” 풍산마이크로텍 해고노동자들과 시청광장에서 함께 노숙할 수 있는 게 용기고, 훌쩍 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1700여 일을 싸우고 있는 재능교육이나 쌍용자동차, 콜트·콜텍, 전북버스로 달려갈 수 있는 게 용기인데 말이다.

나도 해고자였던 시간이 있었다. 부산지하철 매표소에서 일하던 나는, 지하철 역사에 무인화시스템이 도입되자 매표소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1년가량을 부산시청 앞 광장에서 천막을 치고 고용승계 투쟁을 했다. 지금은 민주노총에서 활동하고 있고, 또 지금 하는 일에 만족하고 있지만, 해고자로서의 이력, 복직하지 못한 미완의 꿈은 늘 마음 언저리에 아쉬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예전에 누군가 농담 삼아 “다시 복직시켜준다고 하면 갈 거야?” 하고 묻는 말에 나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물어본 사람은 코웃음을 쳤지만 나는 정말이지 진심이었다. 하긴 꼭두새벽에 일어나 출근해야 하고, 교대해주는 사람 없이는 화장실도 못 가고, 몸이 아파도 마음대로 쉴 수 없는, ‘표를 파는 일’은 말처럼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내 말이 곧이곧대로 믿기지 않을 만하겠다 싶었다. 하지만 한 번쯤 해고당해본 사람은 내 심정을, 그 말이 진심이었음을 알 것이다.

1년 넘는 시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출퇴근 시간에 거리에서 피켓 시위를 했다. 1년 열두 달을 매일같이 하는 일이었지만, 또 매일같이 서러워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아침이면 어딘가로 출근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각자의 가정으로 돌아가는 평범한 일상을 꾸려가는 그들의 삶을 나도 얼마나 누려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억지로 버텨오던 마음들이 푹푹 내려앉곤 했다. 하지만 그런 서러움쯤이야 혼자 삭이면 그만이었다. 그보다 더 힘든 건 역시 생계 문제였다. 그것은 감상이 아닌 현실이었다. 해고자 중에는 막 결혼한 사람도 있었고, 둘째가 태어난 사람도 있었고, 가족이 아픈 사람도 있었다. 자기 의지, 신념만으로는 넘을 수 없는 것도 분명 존재했다.

정리해고자 100명, 계약직 아니면 실직자

투쟁이 중간을 넘어설 무렵 나 또한 하나의 고비를 맞았다. 아버지가 암 진단을 받았다. 평소 건강하기만 하던 아버지가 암 진단을 받았다는 충격과 슬픔이 채 가시기 전에 나는 현실의 많은 문제와 맞닥뜨리게 되었다. 병원비를 감당해야 했고, 아버지 대신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가장 먼저는 아버지가 입원을 해야 했는데 병원에선 믿을 만한 보증인이 없으면 안 된다고 했다. 내가 딸이니 보증을 서겠다고 했지만, 나이도 어리고 직업이 없어서 안 된다고 했다. 아픈 환자를 두고 보증이 없으면 치료해줄 수 없다는 병원도 기막혔지만, 내가 그럴 능력이 없다는 사실은 나를 더 절망케 했다.

참으로 막막하고 불안한 시간들이었다. 그때 내가 만일 해고자가 아니라, 당장에 돈이 없더라도, 빚을 조금 지더라도 벌어서 갚을 수 있는 일자리가 있었다면 그 시간이 조금은 덜 힘들었지 모르겠다. 그런데 복직은 너무나 먼 꿈인 듯싶고, 일을 해야 한다는 불안감은 점점 커졌다. 그래서 투쟁을 포기하려는 고민을 하고 있을 무렵 아버지는 수술을 받지 않겠다는 뜻을 밝힘과 함께 내가 포기하지 않도록 응원해주셨다. 그리고 그런 사정을 안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은 선뜻 아버지의 보증인이 돼주었다. 그런 격려나 도움이 없었다면 아마 나는 그때 투쟁을 끝까지 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가끔 그때 정리해고된 100명이 넘는 매표원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생각한다. 가끔이라도 연락을 주고받는 몇몇은 여전히 비정규직의 삶을 벗어나지 못했다. 주차관리, 보육교사, 영양사, 전기기사, 하는 일은 다양하지만 너나 할 것 없이 1년 혹은 6개월짜리 계약직뿐이다. 그런 일자리조차 구하지 못한 사람은 공공근로를 하거나 여전히 실직 상태로 있다. 그런 사람들은 이제 연락도 잘 닿지 않는다. 한두 사람 건너 전해듣는 소식이 전부다. 하긴 일을 하면서도 살기 힘들다는 요즘, 해고자 또는 실직자로 살면서 인간관계가,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할 리 없다.

옛날 어른들 말씀에 “죽을 용기 있으면 그 용기로 산다”고 했다. 그런데 요즘 하루가 멀다 하고 신변을 비관해 자살하는 사람에 대한 기사를 접하게 된다. 얼마 전에도 나보다 어린 젊은 가장이 생활고를 비관해 아내와 6살 딸이 보는 앞에서 지하철 선로에 투신한 일이 있었다. 사고가 난 날은 부부가 지인에게 돈을 빌리러 갔다가 오던 길이었다. 직장도 없이 초등학생 두 딸을 키우던 가장이 카드빚과 사채업자 독촉에 시달리다 자살을 결심하고는, 이왕 자살할 바에야 어린 두 딸에게 재산이라도 남겨주고 죽어야겠다 싶어 도둑질을 한 사연도 있었다. 두 기사에는 다양한 반응의 댓글이 올라와 있었다. 하지만 기사를 보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들이 적어도 일할 수 있는 직장만 있었어도 이런 선택을 했을까’였다. 물론 일자리 하나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그렇게 쉽게 인생의 끈을 포기하진 않았을 것 같았다.

희망의 근거, 노동마저 빼앗긴 사람들

“인생이란 내일이 오늘보다 낫도록 노력하는 그것이 인생이다.” “노동자란 오늘이 힘들어도 내일의 희망이 있다면 버티는 것이 노동자다.” 하나는 전태일이 우리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에 적혀 있던 말이고, 다른 하나는 김진숙 지도위원이 85호 크레인에 있을 때 퇴거 명령 가처분과 하루 100만원의 이행강제금을 부과한 김신 판사의 대법관 청문회 증인으로 출석해 한 말이다. 비록 오늘은 힘들더라도 내일이 오늘보다 나을 수 있다는 희망. 그리고 그 희망으로 오늘을 사는 사람들. 나는 희망을 스스로 품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노동’이라고 생각한다.

노동할 수 없다는 것, 노동력을 상실한다는 것, 노동할 수 있는 공간을 빼앗긴다는 것은 노동자를 발가벗겨 허허벌판에 던져놓는 일과 같다. 그것은 곧 죽음으로 내모는 일이다. 그런 살인과 같은 해고를 지금 자본은 무자비하게 자행하고, 정부는 그것을 방관한다. 노동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라. 노동할 일자리를 확보하라.

민주노총 부산본부 상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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