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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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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머프들의 특별한 하루하루

66일 만에 최강서씨를 가슴에 묻은 한진중 노동자들 ‘따뜻함 그리고 함께함’이 힘이라는 걸 확인한 나날들
등록 2013-03-09 02:36 수정 2020-05-03 04:27

길 위에 선 노동자들에게 봄은, 가장 늦게 또 매우 낯설게 찾아온다. 누구보다 봄을 기다리지만, 어느 순간 성큼 와버린 봄에 당황한다. 얇은 티셔츠를 내의처럼 받쳐 입고, 그 위에 두꺼운 니트 티셔츠를 한 겹 더 입었다. 마지막으로 패딩 코트까지 걸쳐 입고, 혹시라도 찬바람이 스치진 않을까 깃을 한껏 세운 채 법원으로 향하던 내 콧등에 땀이 맺혔다.
“나는 회사하고 끝까지 갈 것입니다”
2013년 2월27일 오전 11시. 차해도 금속노조 한진중공업 지회장,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 등 5명의 노동자에 대한 구속영장 실질심사가 215호 법정에서 열렸다. 검사는 “‘힘’으로 사 쪽을 굴복시키는 행위는 이제 중단돼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굴복시킨 사 쪽과의 합의를 내세운 힘에 매번 불복하다보면 이런 불법행위가 반복된다며 강력한 법 집행을 위해서라도 이들을 구속해야 한다고도 했다.
검사가 말하는 ‘힘’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 ‘힘’을 가진 사람은 진정 누구인가? 또 검사가 말하는 ‘반복되는 불법행위’를 한 사람이 누구이며, 왜 법의 잣대는 늘 힘없는 노동자들에게만 엄격하고 가혹하게 적용되는가? 한진중공업은 지난 10년간 노사가 맺은 합의를 수없이 번복해왔다. 심지어 국회와 국민까지 나서서 마련한 노사 합의조차 손바닥 뒤집듯 엎어버리는 것이 한진중공업이다. 2012년 12월21일, 한진중공업의 젊은 노동자 최강서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몇년간 반복되던 구조조정에 대한 불안, 그리고 이어졌던 1년간의 정리해고 투쟁, 다시 1년간의 기다림. 그렇게 복직한 공장에서 3시간 만에 무기한 강제 휴업을 당했던 젊은 노동자는 그 절망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목숨을 끊었다.
대여섯 살 아이의 키만도 안 되는 높이에 목을 맨 그는 뒤꿈치만 살짝 들어올리면 살수 있었던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망설임도없이 떠났다. 그렇게 기다리던 복직은 물거품이 되어 돌아왔고, 희망처럼 부여잡고 있던 민주노조는 158억원이라는 손해배상 청구와 복수노조와의 차별적 휴업자 선발로 하나둘 조합원들이 떠나는 상황에서 그는 많이 분노했고 또 그만큼 외로워했다. 그는 가진 자 앞에 졌다고 했지만, 어쩌면 그렇게라도 맞서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밟혀 이제 더는 할 수 없었던 그가 마지막으로 목숨으로 맞선 것이다.
예전 어느 집회에선가 그는 이런 말을 했다. “회사가 가장 큰 실수를 한 게 있다면 바로 나를 해고한 것입니다. 나는 회사하고 끝까지 갈 것입니다.” 그 말처럼 그는 죽어서도 마지막까지 단결의 광장에 누워 투쟁했다. 40일이 넘도록 조문조차 하지 않은 회사가, 각종 언론을 통해 생활고에 따른 죽음이라고 왜곡하고, 노동조합이 유가족과의 접촉을 방해한다며 책임을 회피했다. 그래서 기다리다 못한 유가족은 고인의 주검을 한진중공업 정문 앞으로 옮겨 회사와 직접 대화하기를 원했다. 그렇게 41일 만에 냉동고에서 나온 그의 주검을 막아선 것은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과 비처럼 쏟아지던 최루액이었다.
앞으로 갈 수도, 뒤돌아 나갈 수도 없던 상황에서 그의 주검이라도 지키려고 조합원들은 공장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법에 보장된 자유로운 노조사무실 출입을 원천봉쇄한 회사의 잘못은 묻지 않은 채 노동자들에게는 공동건조물 침입을 운운하고, 합법적으로 신고된 집회와 행진을 무장한 경찰을 동원해 폭력으로 진압하고 가로막은 잘못은 묻지 않은 채 노동자들에게는 집시법 위반을 운운하는 경찰. 억울하게 죽은 동료의 장례라도 치러주려 했던 노동자들의 외침과 몸부림에는 철저하게 눈 막고 귀 닫은 채 회사의 충직한 경비가 되고자 했던 경찰. 몇십 년간 일한 노동자들에게는 줄 돈이 없다면서, 수십억원을 들여 고용한 용역깡패들을 이용해 시시때때로 주검을 침탈할 궁리를 하고 관리자들의 출퇴근 경호를 시키던 회사. 용역깡패의 안전한 출퇴근길을 보장하면서 그 용역깡패로부터 동료의 주검을 지키던 노동자들은 연행하던 경찰. 맨땅 위에 관 하나 덜렁 누이고 혹시라도 주검이 상하지 않을까 매일 관 뚜껑을 열어 드라이아이스를 채워넣어야 했던 유가족과 노동자들의 처참한 심정은 모른 채 ‘시신 시위’라고 매도하던 각종 언론들.
우리가 가진 힘의 실체
대체 우리가 가진 ‘힘’은 무엇인가? 그렇게 철저히 고립되고 왜곡된 채 66일을 싸워 또다시 어렵게 노사 합의를 했다. 그리고 2013년 2월24일, 66일 만에 비로소 그 아까운 사람을 보내줄 수 있었다. 무덤가 사이로 봄 아지랑이같이 피어오르던 담배 연기 위로 햇살이 가랑가랑하는 미치도록 화창한 날씨였다. 김주익·곽재규 열사의 중간쯤 그를 묻었다.
하관식이 진행되는 동안 조합원들 누구 하나 그것을 제대로 지켜보지 못했다. 가까이 가서 보지도 못하면서, 그렇다고 멀리 도망가지도 못하는 불쌍한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은 그날 그렇게 네 번째 동료를 땅에 묻고는, 남은 5명의 노동자들을 다시 경찰서에 바래다줘야 했다.
구속영장 실질심사가 끝나고 조합원들은 또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수갑과 포승줄에 묶인 동지를 보며 하루 종일 마음이 고단했던 그들에게, 늦은 밤이 되어서야 노동자 5명의 구속영장 기각 소식이 전해졌다. 각각 흩어져 수감됐던 그들은 고단하고 성치 않은 몸으로도 서로 만나기를 원했고, 불과 며칠 동안의 헤어짐이었지만 그들은 뜨겁게 재회했다. 그 자리에서 최강서 열사의 부인이 이렇게 말했다.
“정리해고 투쟁 당시 남편에게 희망퇴직을 쓰고 나가자고 했다. 여기 아니면 밥 벌어 먹고 살 곳이 없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남편은 끝내 싫다고 했다. 그때는 남편이 왜 그렇게 한진중공업을 버리지 못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남편이 떠나고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66일의 시간을 보내면서, 그리고 그 시간을 한진 스머프들과 함께 이겨나가면서 그동안 느낄 수 없었던, 말로는 표현할 수도 없는 감정을 처음으로 느껴봤다. 가슴이 뜨겁기도 하고 아련하기도 하고, 남편의 장례를 치르고 집에 돌아와서 남은 그들이 너무 걱정되고 보고 싶었다. 그때 ‘아, 남편의 마음도 이랬구나’ 했다. 너무 늦게 알게 돼서 남편에게 너무 미안하다. 남은 날도 최강서 열사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겠다. 끝까지 함께하자.”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법정에서 그들이 말하는 우리의 힘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돈도 권력도, 법도 제도도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지만 우리의 가장 큰 힘은 바로 ‘따뜻함 그리고 함께함’이었다. 사람에 대한 따뜻한 마음. 그것은 곧 옳은 것을 따르는 양심이 되고, 그것을 지킬 수 있는 신념이 되기도 했다. 또한 불의에 대항하는 용기도 돼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늘 함께였기에 가능했다. 어떤 사람에게는 어제의 그 해가 뜨고 지고, 오늘의 이 달이 내일도 또 뜨는 똑같은 날들일 테지만, 우리에게는 하루하루가 새롭고 특별한 날들이다. 우리가 스스로 조금씩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짓말일 수도 있겠다”
장례가 끝나고 회사 앞 천막도 걷혔다. 하지만 아무것도 남지 않은 그 자리에 다시금 조합원들이 모인다. 투쟁의 공간은 지금 사라졌지만, 열사를 기억하는 한 투쟁의 시간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한낮의 고단한 노동을 마치고, 학교 수업이 끝나는 어린 딸을 데리고 매일같이 경남 김해에서 부산으로 저녁 문화제에 참석하러 가던 한진중공업의 가족이 있었다. 그 젊은 부인과 어린 딸이 나눈 대화가 바로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엄마, 오늘 집회 갈 때 우리 뭐 타고 가?” “이제 집회 안 해.” “그럼 투쟁 끝났어?” “응.” “전에도 끝나서 아빠 온다고 하더니 또 안 오고 또 투쟁 끝났다 하더니 또 하고 또 거짓말하는 거 아냐?” “아니야… 아니, 모르겠다. 거짓말일 수도 있겠다.”

민주노총 부산본부 상담부장
*‘황이라의 스머프 통신’ 연재를 마칩니다. 좋은 글을 보내주신 필자와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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