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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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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9일 스머프들의 복직일

회사의 서약서 요구 꿋꿋이 버텨 전원 복직 이뤄낸 한진중 노동자
김주익·곽재규 열사 추모제, 영도가 다시 푸른 옷으로 물결칠 날 그리다
등록 2012-11-13 19:37 수정 2020-05-03 04:27
2012년 10월의 마지막 밤,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 앞 거리에서 열린 김주익·곽재규 열사 9주기 추모제. 공장 안에서 열리지 못한 이날 행사는 노동자의 쓸쓸한 현실을 보여주는 듯했다. 민주노총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 제공

2012년 10월의 마지막 밤,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 앞 거리에서 열린 김주익·곽재규 열사 9주기 추모제. 공장 안에서 열리지 못한 이날 행사는 노동자의 쓸쓸한 현실을 보여주는 듯했다. 민주노총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 제공

아침부터 문자메시지를 한 통 받았다. 한 동안 연락이 뜸해 잘 사나 보다 하고 있던 친 구였다. “10월의 마지막 날인데 뭐해?” “벌 써?” 하고 달력을 보니, 성질 급한 나는 이미 11월 달력을 세워놓고 그 안에는 하나둘 생 겨나는 일정을 채워놓고 있었다. 그리고 11월 9일에는 빨간 펜으로 겹겹이 동그라미를 그 려놓고 ‘복직’이라 써놓았다. 뒤로 젖힌 10월 달력을 도로 제자리에 돌려놓고 보니, 제일 마지막 칸에 뭔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해야 할 일들이 빼곡했다. 하지만 그 모든 걸 미뤄 놓고 나는 오랜만에 부산 영도의 한진중공업 으로 향했다. 10월의 마지막 날, 김주익·곽재 규 열사 9주기 추모제가 있는 날이었다.

만나본 적 없어도 이름만 들으면

그날따라 이른 추위가 어찌나 극성을 부리 던지, 나는 영도 한진중공업 앞에 도착하고 서도 차에서 내리지 못했다. 차 안에 앉아 도 로를 사이에 두고 바라보는 천막농성장은 한 없이 스산해 보였다. 그나마 추모제가 있는 날이라 지역에서 연대하러 온 사람들과 추모 제를 준비하는 조합원들로 천막이 조금 분 주해 보였다. 하지만 그들 뒤로 보이는 한진 중공업의 높은 담장과 견고한 철문은 여전히 굳게 닫힌 채였다.

해마다 김주익·곽재규 열사 추모제는 한진 중공업 공장 안 단결의 광장에서 전 조합원들 과 부산 지역에서 그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제법 크게 행사를 치르곤 했다. 하지만 지난해 추모제는 공장이 봉쇄된 탓에 외부 손님 참석이 불가능해 현장에 남은 조합원들만 모여 추모제를 지냈다. 그나마도 정리해고 투쟁 과정 중에 희망퇴직을 하거나 파업 대오에서 이탈한 조합원들로 인해 단결 의 광장은 절반도 차지 않았다.

그런데 올해는 아예 공장 안에도 들어가지 못한 채, 거리에서 추모제를 진행하게 되었 다. 불과 몇 해 전만 하더라도 지역의 집회나 행사를 하면 한진중공업의 푸른 작업복만으 로도 대오가 꽉 차던 때가 있었는데, 하며 자 꾸 옛날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추모제가 시작되고, 김주익 지회장의 추모 영상이 상영됐다. 생전 김 지회장의 노동조 합 활동 모습과 일상 모습들 사이로 간혹 환 하게 웃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보는 내내 ‘아 깝고 또 아깝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 리고 김주익 지회장의 장례 영상에선 끝내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벌써 여러 번 본 영 상인데도 볼 때마다 눈물이 나고 가슴이 아 팠다. 이상하게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이 를, 그의 이름만 들어도 눈물이 먼저 나오는 것은 왜일까. 한 번도 얘기 나눠본 적 없는 이 를 이렇게 신뢰하게 된 것은 왜일까.

내가 처음 ‘김주익’이라는 이름을 들은 건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의 추모 사를 통해서였다. 8년 전쯤이었고, 그때 나는 지하철 매표소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 었다. 노동조합의 ‘노’자도 모르던 때고, 대학 을 다니긴 했지만 학생운동과는 거리가 멀었 다. 주야간 교대근무로 바뀌는 낮과 밤에 힘 들어하며 적은 월급과 불안정한 고용으로 생 활의 불만과 부족은 늘 있었지만, 그것은 자 책과 원망으로 귀결되곤 했다. 그 모든 것이 내가 대학을 졸업하지 못하고 능력이 부족해 서 생긴 당연한 일이라 여겼다.

오히려 걱정스러운 것은 복직 뒤

그런데 추모사에 담긴 짧은 글 속에서 나는 내가 알지 못했던 세상을 보고, 내가 감히 꿈 꿀 수 없던 사람들을 보았다. “노예가 품었던 인간의 꿈, 인간답게 살고자 했던 꿈” 그런 꿈 을 꾸는 사람이 있었고, 그것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사람도 있구나. 당시 그 추모 사는 내게 충격 그 자체였다. 나는 지금도 가 끔 마음이 힘들거나 나태해질 때 그 추모사를 다시 읽어보곤 한다. 한진중공업 조합원들에 게 아직도 ‘김주익’이라는 이름은 감출 수 없는 고통인 것 같았다. 추모제 내내 담배 연기가 끊이지 않았다. 김주익 지회장이 목숨으로 지키려 했던 조합원, 그리고 민주노조. 남은 조합원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2011년 11월10일 노사는 “회사는 94명의 정리해고자에 대해 본 합의서를 체결한 날로부터 1년 내에 재취업시키기로 한다”는 합의서에 서명을 했다. 지난 1년 동안 회사는 어용노조를 만들고, 조합원 650명에 대해 일방적 휴업과 선별 복귀, 민주노조에 대한 158억원의 손배소, 그리고 마지막까지도 복직 대기자들에게 노예계약서 같은 서약서까지 요구했다. 근무지 변경에 동의하고, 신체검사 및 신원조회에서 부적격으로 판정되면 어떠한 처분도 감수한다는 내용이다.

복직 대기자들은 많게는 수십 년씩 배를 만드는 고된 노동을 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의 노동으로 한진중공업은 ‘조선 1번지’라는 자랑스런 이름도 얻었고, 그사이 노동자들은 노쇠해졌고 병들었다. 소음성 난청에 근골격계 질환, 디스크…. 성한 몸이 오히려 비정상일 것이다. 그런 노동자들을 신체검사를 통해 부적격이 판정되면 복직시킬 수 없다는 한진 자본가들의 몸속 피는 따뜻하긴 한 걸까.

회사는 11월9일 아침까지도 복직 대기자들에 대한 부서 발령을 내지 않았고, 조합원들은 아침 7시부터 회사 정문에서 피케팅을 진행했다. 그 과정에서 본관 로비에서 3시간가량 연좌농성까지 했고, 회사는 관계 법령을 들먹이며 몇몇 복직 대기자들에게 타 부서 이동 등을 제시하며 끝까지 합의서를 훼손하려 했다. 복직 대기자들의 요구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였다. “합의서를 이행하라!” 애초 복직 합의는 조건 없는 복직이었다. 조합원들의 강력한 요구에 회사는 끝내 복직 대기자 92명 전원에게 원직 복직 발령을 내렸다. 나는 그들의 복직에 대해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다. 오히려 걱정스러운 것은 복직 뒤의 일이다.

조합원들이 돌아갈 공장은 예전 그들이 손때 묻은 연장과 작업복을 놓고 나오던 그날의 공장이 아닐 것이다. 공장은 여전히 돌아가지 않고, 지난해 휴업을 나간 조합원들도 1년 넘게 공장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복직되더라도 또다시 회사는 휴업 내지는 교육 배치, 선별 배치 등으로 내부를 분열시키려고 갖은 술수를 부릴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한진중 스머프들이 다시 한번 잘 이겨낼 것이라 믿는다. 김주익 지회장이 죽음으로 지키려 했던 민주노조 깃발. 이제는 그들이 지켜야 할 차례다. 9년 전의 땅을 치는 후회와 죄책감, 슬픔을 다시금 가슴에 새겨야 할 때다.

푸른 옷의 물결이 있는 저녁

예전에는 한진중공업의 나지막한 담장을 따라 장미 넝쿨이 탐스럽게 피었다고 한다. 부산을 처음 방문해 관광하던 사람들도 영도를 지나다 예쁜 담벼락을 보며 ‘여기가 어디냐’고 물어보기도 하고, 가던 길을 멈추고 사진을 찍기도 했단다. “여기는 한진중공업입니다.” “부산의 향토 기업, 자랑스런 조선 1번지 한진중공업입니다.”

망치 소리가 들리고, 용접 불똥이 튀고, 저녁이면 푸른 한진 작업복의 노동자들이 정문에서 쏟아져나오는 그런 날이 난 꼭 보고 싶다.

민주노총 부산본부 상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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