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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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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사람들

김진숙 지도위원 항소심 기다리며 본 기이한 풍경이 불러일으킨 기억
퇴직금 못 받고도 법 앞에 위축되던 ‘어르신’ 노동자들을 생각하다
등록 2012-05-05 16:43 수정 2020-05-03 04:26

"한국의 법은 만인에게 평등한 것이 아니라 만 명에게만 평등하다." 노회찬 19대 국회의원 당선인이 한 이 말을 뼈저리게 절감하는 노동자가 많다. 2008년 공정한 판결을 요구하는 성모병원 노동자들의 집회. 김명진 기자


지난 4월20일,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의 항소심 재판이 있었다. 지난해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문제 해결을 위한 309일 크레인 농성 관련 재판이었다. 항소심 앞에 있던 재판들이 밀린 상황이라 우리는 조금 기다려야 했다. 방청석에 앉아 다른 재판들을 지켜보며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하다’고 배웠던 학창 시절이 떠올랐다.

우리보다 앞서 재판받은 사람들은 대학생쯤 돼 보이는 남학생과 30대로 보이는 남자, 그리고 40대 중·후반의 남자였다. 재판은 다들 채 10분을 넘기지 않은 짧은 시간 안에 끝났고, 대학생과 젊은 남자는 다음 재판 기일을 통보받고 돌아갔다. 그들은 재판장에 들어서 퇴장할 때까지 연신 낮은 자세와 조심스러운 말투로 일관할 만큼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가난한 이에게 징역보다 무서운 벌금

평소 딱딱하고 권위주의적인 법원의 모습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았다. 그들 중 제일 마지막에 재판을 받은 4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남자는 어떤 사정으로 재판까지 왔는지 알 수 없었지만, 1심 재판에서 1400만원의 벌금형을 받았다. 그런데 검사는 형이 너무 가볍다며 항소를 했고, 이날 그 남자의 변호인은 검사의 항소를 받아들이겠다는 말과 함께 변론을 시작했다. 벌금 1400만원은 어렵게 생계를 꾸려가는 피고인이 도저히 낼 수 없는 큰돈이므로 그 사정을 살피어 재판부에서 실형 대신 집행유예를 선고해달라는 내용의 변론이었다.

재판부는 검사의 항소를 받아들이는 경우는 처음 봤다며 다소 당황해하는 듯 보였으나, 이내 판사를 비롯해 재판 참여관들과 검사, 다른 사건의 변호인들이 웃기 시작했다. 물론 조롱하는 웃음은 아니었다. 그 재판정에서 웃지 않은 사람은 그 남자와 우리뿐이었다. 이런 일이 잘 벌어지지 않는가 보다 생각했지만, 그것보다 그 남자의 마음이 어떨까 생각하니 도저히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1400만원을 낼 수 없었던 남자가 벌금을 내지 못해 다시 범죄자가 되는 것보다 어쩌면 실형을 받게 될지 모를 검사의 항소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상황이 너무나 씁쓸했다. 그 남자도 자신의 신세가 얼마나 초라하고 자존심이 상했을까. 법의 문턱은 높고, 그 아량은 엉뚱한 곳에서 베풀어진다.

몇 해 전, 부산의 녹산공단 안 조선기자재 업체에서 일했던 연세가 꽤 지긋한 노동자 5명이 퇴직금을 받지 못해 민주노총 부산본부 상담소를 찾아왔다. “아, 어떻게 해? 직원들을 자른다는데, 우리 같은 늙은것들이 나와야지.” “아니 근데, 우리가 나오는 건 나오는 건데 줄 돈은 줘야 할 거 아니여.” “아니, 우리가 다 달란 소리도 안 했어. 조금이라도 주면 우리가 이래는 안 하지.” 10년 가까이 일했지만, 최근 회사가 어려워져 그만두게 됐다는 어르신들은 회사에 퇴직금 지급을 요청했더니 회사는 매달 꼬박꼬박 퇴직금을 지급했다고 하더란다. 준 사람은 있는데 받은 사람은 없는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법이 보장한 권리 주장을 윽박지르는 노동부

사정을 알아봤더니, 몇년 전 이 업체에서 일하던 다른 노동자가 퇴직하며 노동부에 퇴직금 미지급 신고를 해 퇴직금 전액을 수령해간 적이 있었다. 그러자 회사는 그 일이 있은 뒤 편법적으로 직원들 임금에서 매달 일부를 떼어 퇴직금 명목이라며 지급해왔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방적인 퇴직금 분할 지급은 불법일 뿐만 아니라, 명목상 퇴직금으로 지급된 것이긴 하나 이는 엄연히 임금이었다. 퇴직시 퇴직금은 별도로 지급해야 하는 게 당연하다.

그렇게 해서 다섯 어르신들의 ‘떼인 돈 돌려받기‘의 험난한 과정이 시작됐다. 그런데 시작부터 어려운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왕 시작한 싸움, 그간 지급받지 못했던 연차휴가 수당까지 청구하니 금액이 꽤 됐다. 물론 어르신들의 근무 기간을 생각하면 그리 많은 금액도 아니었지만, 이 착하고 순진하기 그지없는 어르신들은 당신들이 그 돈을 다 받게 되면 사장이 정말로 망할지 모른다고 걱정했다. 정말 말문이 막히는 순간이었다.

노동부에 체불임금으로 진정을 넣고 나면 한두 차례 직접 출석해 조사를 받아야 했는데, 아 글쎄, 어르신들이 상담하실 때는 사장 10명을 때려잡을 것 같던 기세가 노동부 근로감독관 앞에만 서면 그만 봄의 아지랑이 꽃처럼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게다가 근로감독관이라는 사람은 조사받으러 간 어르신들께 그동안은 가만히 있다가 왜 하필 지금 연차수당은 달라고 하느냐고 했다는 것이다. 근데 이 말을 들은 어르신들은 또, 지금이라도 당연히 받아야 할 권리를 주장한 것이 마치 큰 잘못이라도 되는 양 내게 찾아와 어떡하냐고 묻는다.

뭘 어떡하긴 어떡해. 나는 뒷북 소리 들을세라, 얼른 어르신들을 앞세워 근로감독관에게 항의하러 갔다. 그제야 감독관은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왜 그동안 받지 못했느냐고 물어본 것이란다. 그건 법을 어긴 사장에게 왜 그동안 주지 않았느냐고 물어봐야 당연한 것이다. 법에 보장된 권리를 왜 찾지 못했느냐고 그들을 다그칠 것이 아니라, 있는 법이라도 잘 지켜질 수 있게 관리·감독해야 할 행정기관이 책임을 느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이렇게 노동부나 법원에 가는 것을 꺼린다. 행정 처리 절차가 복잡하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이유도 있겠지만, 억울함을 호소하는 그들을 오히려 다그치고 나무라고 내심 귀찮아하는 행정기관의 고압적인 태도를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김진숙 지도위원의 1심 판결문에 이런 문구가 있다. “목적의 정당성만으로 수단의 불법성이 용인될 수 있는 시기는 지나가야 한다고 믿는다.” 현대자동차 노동자들과 현대미포 조선 노동자들은 비정규직 해고가 불법이라는 대법원의 판결까지 받았음에도, 그 법이 지켜지지 않아 공장점거 농성과 고공굴뚝 투쟁까지 해야 했다. 법대로 하라고 해서 법대로 했고, 그럼에도 끝내 그 법마저 이행하지 않는 자본가들을 향해 노동자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

힘없는 이들의 숙인 허리 위에 세워진 ‘권위’

이렇게 억울한 노동자들에게 수단의 불법성을 운운할 것이 아니라 평소 법과 원칙, 사회질서를 중요시하는 사법부가, 대법원이 내린 판결도 지키지 않는 자본가들의 오만함을 먼저 심판해야 하는 게 아닐까. 사법부의 권위는 잘 다린 법복 속에서, 가진 것 없고 힘없는 이들의 숙인 허리 위에 지켜지고 세워지는 것이 아니다. 법이란 힘없는 자들부터 먼저 지켜야 하고, 악법은 지킬 것이 아니라 고쳐야 하며, 그때그때 사람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닌 누구에게나 한결같아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법의 권위, 사법부의 권위가 제대로 세워질 것이라 생각한다.

궁금한 분들을 위해 덧붙이면, 그 어르신들은 노동부와 대한법률구조공단, 그리고 법원의 민사재판까지 가는 무려 1년에 걸친 어려운 과정을 통해 퇴직금과 연차휴가수당을 겨우 지급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나마도 100% 지급받지 못했고, 마음 약한 어르신들이 체불임금 액수를 대폭 삭감한 뒤에야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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