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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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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럼비로 가는 먼 길

등록 2012-04-27 17:10 수정 2020-05-03 04:26
일러스트 장광석

일러스트 장광석

구럼비로 가는 길이 왜 이리 멀까. 평화로 가는 길이 왜 이리 멀까. 자연으로 가는 길이 왜 이리 멀까.

출소 이후 문정현 신부님을 찾아뵙겠다고, 구럼비를 보겠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자꾸 시간은 가고, 결국 문정현 신부님이 7m 높이에서 추락해 병원에 입원하신 뒤가 되고 말았다. 그사이 쌍용자동차에서는 22번째 안타까운 죽음이 다시 나왔고, 나는 다시 어디엔가 홀린 듯 정신을 잃고 서울 대한문 분향소 앞을 목발을 짚은 채 안절부절못하며 서성이고 있었다. 어떤 곳에 안정이 있을까. 쉼이 있을까. 웃음이 있을까.

꽃비보다 더 처절한 울음소리들

구럼비로 출발하던 날도 쌍용자동차 대한문 분향소 앞에서는 한판 싸움이 벌어졌다. 문화예술인 기자회견을 끝내고 마지막 상징의식으로 미술굿과 함께 걸개그림을 걸려는데 경찰이 밀려 들어왔다. 불법 시위 물품이라고 한다. 전쟁 중에도 분향소는 허락하고, 문화예술품은 훼손하지 않는다고 사람들이 항의했지만 막무가내였다. 결국 쌍용자동차 김정우 지회장이 잡아가라고, 나를 죽이라고 몸부림치고서야 간신히 미술인들이 준비해온 초라한 추모 걸개그림 하나를 걸 수 있었다. 이미 절반이 찢어져나간 채였다.

서울에서 푸닥거리를 한판 한 뒤 저녁, 제주대병원에 입원 중인 문정현 신부님을 찾아뵈었다. 검은 해처럼 검붉은 모습, 간신히 몸을 일으키는 거리의 성자. 무슨 말을 드릴 수가 없었다. 죄송하다고, 이제야 찾아왔다고 간신히 입을 뗐다. 지난 몇 년 신부님을 쫓아, 신부님을 그늘로, 방패막으로 삼아 살아왔던 무수한 현장과 그 악다구니들과 눈물이 떠올라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다음날 한반도의 최남단 강정마을은 아비규환이었다. 공사를 막겠다고 사람들이 차가 슁슁 지나가는 거리로 뛰어들었다. 몇 시간 동안 여기저기에서 경찰과 지킴이들이 회오리처럼 얽혔다. 급기야 세 사람이 레미콘 위로 올랐고, 경찰들은 안전장구 하나 없이 진압에 나섰다. 너희들이 그렇게 용산에서 사람들을 죽이지 않았느냐고, 사람들이 울부짖었지만 듣는 귀가 없었다. 동백꽃만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벚꽃잎만 무수히 날렸다. 꽃비보다 더 처절한 울음소리들. 쇼크를 받고 쓰러져 비명을 지르는 청년들, 청년들.

4월14일 연행된 12명이 아직 풀려나지도 않았는데, 다시 4명이 연행되었다. 그렇게 싸움을 하고 있는데 문자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한문 분향소에서 다시 2명이 다치고 전태일 열사의 동생인 전태삼 선배님 외 4명이 연행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목발을 곁에 두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만도 힘들었다. 아니 가만히 앉아 있어야만 하는 내가 처량하고 부끄러웠다.

구럼비로 가는 길, 쌍용자동차 대한문 분향소로 가는 길이 멀게 느껴지는 까닭은 기실, 내 마음속에 있었다. 조금은 더 쉬고 싶고, 웬만하면 다시 끌려가는 상황까지는 피하고 싶은 내 마음속에 먼 길이 있었다.

비틀거리는 세상 떠받치는 고결한 삶

왜 사랑으로 가는 길은 이리 먼지. 왜 환한 웃음으로 가는 길은 이리 먼지. 얼마나 더 걸어야 저 평등의 바다에 다다를 수 있는지. 얼마나 걸어야 저 무욕의 바다에 다다를 수 있는지. 하지만 나는 안다. 오늘의 이 길이 저 평등의 바다로, 저 평화의 바다로 곧게 뻗은 길이라는 것을. 참된 역사의 심연으로 향하는 길이라는 것을. 오늘의 이 절규가, 오늘의 이 눈물이, 오늘의 이 몸부림이, 잠든 이 세상을 깨우고, 탁한 이 세상을 정화하고, 비틀거리는 이 세상을 떠받치는 고결한 삶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싶다. 며칠 사이 다시 끌려갔다 온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남긴다.

송경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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