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보기보다는 나이가 어려요.”
그 말에 나는 햇볕에 그을린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잠시 뜸을 들이다 나는 대꾸했다.
“보기에도 충분히 제 나이처럼 보이세요.”
그는 웃는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얼굴이 속된 말로 ‘야간노동의 폐해’라고 할까나.”
40대 초반의 그는 이때껏 공장 밥을 먹었다고 한다. 나는 주름 잡힌 그의 얼굴이 아닌, 뒷목 쪽에 슬쩍 보이는 화상 자국에 눈을 두었다. 용광로에 쇠 녹이는 작업을 하다가 등 쪽으로 쇳물이 튀었단다. 다행히 겨울이라 옷을 두껍게 입어 피해가 덜했다는 그의 말을 들으며 나는 중얼거렸다. ‘아팠겠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용광로 쇳물을 다루는 것이 그의 20년 인생이라 했다.
모래 분진이 떠다니는 작업장홍완규씨는 시골 어디에나 있을 법한, 바지런하고 가난한 부모가 있는 집에서 태어났다. 늦게 자식을 둔 아버지에게 아들은 그 하나였다.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아버지 나이가 환갑이었다. 그는 대학을 포기하고 일거리를 찾았다.
2년간 집을 떠나 대규모로 돼지를 사육하는 농장에서 일했다. 사람이 돼지보다 못한 곳이었다. 한여름 시어빠진 김장 김치가 전부인 밥상을 앞에 두고 곱게 갈린 가축용 고급 사료에 애먼 질투를 해대야 했던 곳이다. 마침 아버지의 병환이 깊어졌고 그는 고향 충북 영동으로 내려왔다. 죽기 전 손자를 안아보고 싶다는 아버지의 말에 결혼도 서둘렀다. 그에게는 친구 동생으로 만나 연인이 된 여자가 있었다. 둘 다 갓 스물을 넘긴 나이였지만, 부모님 집에 들어와 살림을 차렸다.
그에게 가정이 생겼다. 새로이 일자리를 알아봐야 했다. 유성기업이 영동으로 자동차 부품 공장을 이전할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유성은 수개의 자회사를 가진 건실한 회사였다. 자신이 공장 생활을 하게 될 것이라 생각해본 적도 없는 그였다. ‘공순이’ ‘공돌이’라는 말이 흔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먹고사는 일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는 유성에 입사했다.
공장이 이전되기 전이라 그는 경기도 부천 공장까지 올라가 3개월 수습 생활부터 시작했다.
“거기서 수습을 할 때, 밥도 우리 돈으로 사먹고 잠잘 곳도 없어 회사에다 말해 간신히 지하 셋방을 하나 얻었어요. 비가 오면 뚝뚝 다 새고 연탄도 우리가 직접 사다가 갈아야 하고…. 어렵게 출발을 했어요.”
정직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회사는 그들에게 어떤 것도 내주지 않으려 했다. 임시직으로 있다가 작은 실수라도 하면 그대로 짐을 싸서 떠나야 하는 것이 수습 인생이었다. 그 3개월을 견뎌내니 정식 직원이 되어 영동에 내려올 수 있었다.
영동으로 온 뒤 생활이 좀 편해졌느냐고 물으니 그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일은 3D 업종이라고 했다. 주물이 주 업무였다. 모래에 약품을 넣어 틀을 뜨고 거기에 달궈진 쇳물을 붓는 일이다. 쇳물 온도는 1천℃가 넘었다. 늘 위험이 도사렸다. 고온만이 위협이 아니었다. 작업장에는 늘 모래 분진이 떠다녔다. 작업환경이 그나마 나아진 지금도 회사는 관례적으로 막걸리와 돼지고기를 내놓는다고 했다. 먼지 낀 목을 돼지고기로 씻어내라는 것이다.
1993년, 그는 주물 제품을 옮기던 중에 기계 벨트에 손이 감겨 들어가는 사고를 당했다. 소식을 들은 아내가 병원으로 달려왔다. 아내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다친 손보다 얼굴을 보고 더 놀랐다.” 저 검고 거친 얼굴의 사내가 내 신랑인가 싶고, 낯선 그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가슴이 아프기도 했단다. 급히 병원으로 후송하느라 씻을 새 없던 그의 얼굴은 온갖 분진과 모래를 먹어 검붉었다. 아내는 그런 몸을 하고 일해온 남편을 걱정하고, 남편은 첫아이를 임신한 상태에서 수발을 들게 된 아내를 걱정하며 6개월을 보냈다. 퇴원 뒤, 홍완규씨는 다시 유성으로 돌아갔다.
쇳물이 뜨거워도 졸음은 못 이겨유성으로 돌아간 까닭은 생계에도 있지만, 그동안 정붙인 사람들 때문이었다.
“수습 때 밥을 못 먹고 있으면 형님들이 덮밥이나 공깃밥 하나 더 들여서 저희 불러 이걸로 저녁 먹으라 하고. 원래는 그냥 직장이구나 했죠. 먹고살려고 어쩔 수 없이 들어왔으니 무슨 비전이나 희망을 품었겠어요. 그런데 며칠 일을 하다 보니, ‘나름대로 사람들이 어울리고 이런 분위기가 괜찮네’라고 느끼면서 정붙이게 됐죠.”
유성은 그의 일터이자 삶이 되어갔다.
정붙인 세월이 20년 흘렀다. 그와 동료들은 이제 40∼50대의 늙은 노동자가 되었다. 그들은 현재 충남 아산의 한 농터에서 노숙을 하고 있다. 비닐하우스에 스티로폼을 깔고 먹고 자는 생활이 3개월째다. 2년 전 회사가 약속한, 야간노동을 없앤 ‘주간 연속 2교대’ 근무제를 시행하라고 요구한 대가였다. 교섭에 성실히 임하지 않는 회사에 항의하며 노동자들은 2시간 부분파업을 했다. 회사는 즉각 직장폐쇄로 답했다. 노동자들은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고 공장 밖으로 내몰렸다. 이미 지난 6월, 노동조합이 파업 철회와 현장 복귀를 선언했으나 유성은 여전히 직원들의 출근을 거부하고 있다.
밤에 일하지 않겠다. 주간 2교대로 일하겠다. 홍완규씨는 이것이 절대 배부른 소리가 아니라고 했다. 그동안 유성기업 직원들은 주야간 10시간 이상 노동을 해왔다. 그는 자신을 가리켜 150:1이라고 했다.
“한동안 회사에 그런 유머가 돌았어요. 우리는 150:1의 가능성이다. 1년에 개인 질병이든 뭐든 꼭 1명 이상 죽어요. 그러니 우리도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 우리가 150명 정도고, 1년에 한두 명씩 우리 곁을 떠나가니까. 우리는 150:1이라고.”
150분의 1은 너무 낮은 가능성이 아닌가 싶었다. 최근 1년6개월 사이 유성기업에서 5명의 노동자가 죽어서 나갔다. 뇌출혈, 돌연사,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 등이 이유였다. 그들은 주야간 맞교대 근무를 했다. 하루 2시간 이상 시간외근무, 매주 토요일 7.5시간 특근이 이어졌다.
“10시간 이상씩 노동할 때도 야간에 쉬는 시간이 없어요. 밥 먹는 시간 딱 30분 있고 바로 작업에 들어가야 하거든요. 사람이 완전히 파김치가 돼요. 밥 먹고 기계 옆에 신문지 깔고 잠깐 자요. 그게 한 20분, 30분? 그럼 나이 드신 형님들이 와서 ‘이 새끼들아, 잠자러 왔느냐’, 그러면 일어나서 일하고. 아무리 쇳물이 뜨거워도 잠이 오면 그냥 눈이 감겨버려요. 아무 생각 없이 멍해요. 잠 깨려고 왔다갔다, 무의식중에 걸어요. 나중에는 처참해지면서 ‘아, 이렇게 벌어먹고 살아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고.”
자고 싶다. 그래서 물량을 빨리 뺐다. 생산량을 확보하고 남은 시간에 눈을 붙였다. 관리자들은 시간이 남아 그런다며 생산 속도를 높였다. 일은 늘고 잠잘 시간을 확보하려고 더 빠르게 일해야 하는 악순환이 거듭됐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몸이 닳고 닳았다”. 유성에는 몸이 닳아 세상을 떠난 사람이 많았다. 그들 중 한 사람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형님을 마지막으로 본 게 출근카드 찍는 곳에서였어요. 형님은 아침에 퇴근하는 중이고 나는 출근을 하고. 출퇴근할 때 보면 서로 고생했다고 인사를 해주거든요. 그날도 고생했다고 악수하고 헤어졌는데, 그 형님이 퇴근 버스 안에서 돌아가신 거예요.”
그의 선배는 버스 좌석에 앉아 감은 눈을 뜨지 못했다. 장례가 치러지고, 유가족은 과로사를 주장했다. 회사는 인정치 않았다. 장례 전 고인이 일하던 일터에 운구차를 들이려는 유족의 바람도 회사는 거부했다. 장례식 날, 회사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운구차가 정문 앞에 섰다. 직원들이 회사 마당으로 나와 고인이 가는 길에 을 불렀다.
“그래서 그 노래를 부를 때면 형님이 생각나요.”
회사에 맞서 농성 중인 홍완규씨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을 들을 터였다. 안타까움은 사라지지 않고 매일 반복될 것이다. 그래서인가, 100일 가까이 길거리 생활을 견뎌내며 그는 동료들의 곁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집에 두고 온 짐은 생각보다 컸다. 그는 5살짜리 늦둥이 딸과 선천성 동정맥 기형을 앓는 작은아들, 수험생인 큰아들을 두었다. 집에서 멀찍이 떨어진 대학병원에서 작은아들의 약을 타오는 일은 그의 담당이었다. 농성을 시작한 뒤에도, 약을 전하는 일은 미룰 수 없었다. 농성은 늘 분주했다. 어느 날은 긴급한 회의가 이어져 집에 약을 가져다줄 시간을 놓쳐버렸다. 그날 바로 아내에게서 연락이 왔다. 작은아들이 쓰러졌다고.
집에 두고 온 것이 많아 힘들겠다고 하니, 그는 다시 손사래를 쳤다.
“나만 그런가요. 여기 있는 사람들 다 마찬가지죠.”
그는 담담했다. 그런 그가 울컥 쏟아지려는 울음에 입을 다문 것은 큰아들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다. 농성장으로 떠나는 날 아침, 아내는 큰아들의 말을 전하며 울었다. 고3인 아들이 대학에 가지 않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직장을 잃은 아버지 때문이었다. 등을 돌려 문을 나섰지만, 그의 마음은 집에서 멀어질 줄을 몰랐다.
“아빠가 경험해봤기 때문에… 네가 공부를 포기하고 일을 하는 길만은 안 갔으면 좋겠다.”
그 말만을 해두고 왔다. 가슴에 못 하나를 박은 아들이 몇 주 뒤, 밤늦게 집에 돌아온 그를 불렀다.
“아빠는 회사에 복귀 안 했으면 해요.”
아들은 인터넷에서 유성기업 소식을 찾아본 듯했다. 회사는 노동조합과 결별한 노동자들의 개별 복귀만을 허용했다. 복귀한 직원들은 노동조합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야 했다. 회사에 돌아가려면 관리자들 앞에서 ‘나는 개다’라고 외쳐야 한다는 소문도 들렸다. 회사 안에는 회사 쪽 입장에 선 노동조합이 새로 생겨났다. 아들은 말을 이었다.
“아빠는 비겁하게 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는 끄덕였다. 그리고 약속했다.
“아빠는 불쌍하게 살아갈지언정 비겁하게는 안 산다.”
“평생직장에 다시 돌아갈 것”지난 6월22일, 단기 고용한 용역 직원들과 농성 중인 노동자들 사이에 충돌이 있었다. 회사 복귀를 요구하며 출근선전전을 하는 노동자들에게 용역 직원들은 소화기를 뿌리고 각목을 휘둘렀다. 그러나 홍완규씨에게 젊은 용역 직원들의 주먹보다 아픈 것은 그들이 입은 작업복을 보는 일이었다. 용역 직원들은 그가 20년을 입어온 회사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야간작업 중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2m 상단에서 떨어진 그의 동료가 입었던 작업복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감은 눈을 뜨지 못한 형님이 입었던 작업복이다. 고온의 쇳물에 살갗과 함께 타들어가던 자신의 작업복이었다.
이제 그는 다른 옷을 입고 있다. 그와 동료들이 단체로 맞춘 파란 반팔 옷에는 “노동자는 올빼미가 아니다”라고 쓰여 있다. 그에게 물었다, 야간노동이 없어지면 무엇이 좋으냐고.
“성격이 유해지겠죠. 마음이 편해지고.”
잠이 부족하니 짜증을 내는 일이 잦아졌다. 늦둥이 막내딸 울음소리도 야간노동을 하고 와서 들으면 고역이었다. 아내는 그가 일을 갔다 돌아오면 자는 아이를 둘러업고 밖으로 나갔다. 고작 마음 편해지는 것, 그것뿐이었다. 그러니 회사가 허락해주지 않았다. 밤낮으로 생산해야 하는데, 부품을 조달받는 원청 대기업 자동차 회사들도 주야간 교대근무를 고집하고 있는데, 늙은 노동자들이 감히 마음 편하겠다고 밤노동을 거부하다니. 회사는 허락할 리 없고, 노동자들은 싸우고 있다.
“평생직장인 줄 알고 근무하셨을 텐데, 중간에 이런 일이 생겨서….”
나는 끝맺지 못할 말을 던졌다. 그러자 홍완규씨는 단호히 부정했다.
“아니요. 제 평생직장이에요. 저는 다시 들어갈 거예요. 떳떳하게 들어가 정년까지 근무할 자신이 있어요.”
독일 수면학회 발표에 따르면, 야간 교대근무자의 80%가 수면장애에 시달리고 야간노동은 사람의 수명을 평균 13년 단축시킨다. 2007년에는 세계보건기구(WHO) 국제암연구소(IARC)가 야간노동을 2급 발암물질로 규정했다.
글 희정 제2회 손바닥 문학상 당선자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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