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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하는 여학생들

등록 2011-06-24 16:43 수정 2020-05-03 04:26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개개인의 경험(‘한 시대’란 경험의 둘레와 그 공통의 품질에 의해 공유된다)에 편차가 심하고 기억에도 물매가 있겠지만, 소싯적에 나는 여학생들이 별나게 욕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다. 기껏, ‘이, 머스마야!’ 하는 정도에서 멈췄다. ‘요즘 애들은 못 쓰겠어!’라는 격언(?)이 유구한 역사를 지녔다고 하듯이, 예나 지금이나 불량한 학생들은 끊이지 않는다. 그렇다. 불량성이란 늘 구조적·체계적인 것이다. 초·중등학교 시절 내가 몸담은 운동부의 안팎에서는 욕이 번창했고, ‘칠공주파’니 뭐니 하는 전설적인 여학생 왈짜들 사이에서도 입담이 거칠었다.

로컬한 욕의 죽음

그러나 결정적 차이는 욕들의 유통경로였다. 치안(police)이 워낙 치도(治道)의 내력을 지니기도 하지만, 당시의 욕설은 사람들 사이 대면적 상호작용의 너머로는 나다닐 데가 없거나 적었다. 지금이야 2공간(사이버 공간)에다 3공간(유비쿼터스·스마트 공간)조차 더러 실감이 나지만,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우리는 동네의 한 곳(주로 만화방)에 모여 TV 드라마를 보고, 고3의 끄트머리에 닿아서야 서울이란 데를 알았다. 서울에서 만난 내 학생 중 몇몇은 부산이 경상북도에 있다고 믿었고, 대학에 가서야 처음으로 바다를 보았다는 학생도 더러 있었다. 사정이 이러한데, 욕설이란 근본적으로 ‘로컬’한 현상이었고, 전일적·체계적으로 모방욕망을 가동할 유통로가 없었다.

욕의 유통경로가 워낙 빈소한데다 그 진입 비용이 만만치 않던 게 일종의 정화장치가 되기도 했다. 먼 옛날, 교회학교의 선생님은 “그런 말을 쓰려면 교회에 나오지 말라!”며 나를 꾸짖었고, 나는 이후 운동부의 안팎에서 로컬하게 유통되던 욕설이나 거친 말을 삼갈 수밖에 없었다. 조지 오웰은 계급 격차를 냄새의 문제로 풀기도 했지만, 욕설을 포함한 어투나 어휘는 한 계층이나 영역의 실질적인 수호부(守護符)가 된다. 철학자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이후 지식인의 ‘지위 불안’(Status Anxiety)은 깊어져왔고, 그들의 ‘전문성’은 신매체 확산에 얹혀 시대의 언어를 석권하는 대중에 대한 양가적 감정을 잘 반영한다. 평등사회든 자유사회든 나름대로 계급·계층적 구분이 있겠지만, 우리 시대의 새로운 표준어가 돼가는 젊은이들의 욕설은 가히 증상적이다.

인문학을 아예 ‘매체(개)학’으로 부르자는 제안도 있듯이, 여러 매체가 존재를 지배하는 세상이다. 과연 ‘매체는 존재의 닻’(김성기)인 셈이다. 각종 매체들은 자본제적 삶의 단말기로서 무엇보다 모방욕망의 유통에 충실하다. 그중에서도 욕설은 유통이 빠르며, 전자매체의 약어(略語) 구조가 배제하는 서사의 공백을 재바르게 채운다. 기능화된 언어의 요약과 단축은 곧 ‘사고의 단축’(마르쿠제)으로 이어진다는 주장만으로는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

욕을 생산하는 매체

언어와 사고의 단축은 곧 폭력으로 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므로 전자매체의 약호화된 소통방식과 언어폭력 사이에 어떤 관련성을 찾아내려는 시도는 단지 구세대의 자기방어적 공세가 아니라, 상징화·서사화의 부재와 공백에 밀려드는 원초적 열정을 지적하는 것이다. 매체는 욕설을 신속하게 전달하는 수단만이 아니다. 그것은 욕설을 생산하며, 풍성하고 긴밀한 이야기의 공간을 새로운 형태의 폭력으로 채운다. 근일 초·중·고교생 가운데 욕설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학생은 20명 중 1명에 불과하다는 통계가 나왔지만, 내가 사는 경남 밀양의 여중생들도 ‘좆나게’ 욕을 해댄다.

김영민 철학자·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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