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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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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이 화장을 왜 하니?”

학교에서 무시당하고 집에서 위안받지 못하는 현실을 탈출하고 싶은 소녀들의 문화적 무장, 10대 뷰티 열풍
등록 2011-06-10 11:01 수정 2020-05-03 04:26
'2010 여성 경력 이어주기 취업박람회'를 찾은 한 여고생(오른쪽)이 메이크업 컨설팅을 받고 있다. 한겨레21 이종찬

'2010 여성 경력 이어주기 취업박람회'를 찾은 한 여고생(오른쪽)이 메이크업 컨설팅을 받고 있다. 한겨레21 이종찬

10대 소녀에게 ‘뷰티 행동’(메이크업, 헤어디자인, 네일케어 등)은 꽤나 익숙한 문화다. 심지어 최근 몇 년 사이 초등학생에게조차 메이크업 바람이 불고 있다. 쉬는 시간의 화장실은 문자 그대로 제 기능을 하고 있고, 화장하는 학생이 넘쳐나다 보니 일선의 교사들도 ‘클렌징’에 애먹고 있단다. 방과 후에는 라이너와 비비크림은 기본이고,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떡칠’하는 친구들도 있다. 이제 교복 차림에 색조 화장을 한 소녀들을 마주치는 게 낯설지만은 않다.

이런 풍조가 염려스러운지, 각종 언론에서는 걸그룹 열풍을 추종하는 10대들의 모방 심리를 질타하기 급급하다. 또 치장해봤자 머릿결이나 피부가 빨리 상할 뿐이라며 제 몸 관리 하나 못하는 소녀들을 보고 혀를 차기 일쑤다. 그러나 그들도 안다. 우리 역시 술과 담배가 몸에 해롭다는 거 다 알면서 하지 않는가. 그들에게는 건강과 맞바꿔도 무방한 뭔가가 있다.

여기 주목할 만한 사실이 있다. 최근 뷰티산업계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뷰티 행동은 청소녀의 학업 성적과 관계 있다고 한다. 성적이 낮을수록 화장이 짙어진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공부 못하는 아이들이 말썽 부린다는 식으로 이해해선 곤란하다. 왜냐하면 학교에서, 그리고 그 외의 공간에서 이 친구들이 어떤 경험을 하는지가 더 중요한 문제일 수 있기 때문이다.

10대 소녀에게 확산된 최근의 뷰티 열풍은 또래 유행을 빼고선 설명이 어렵다. 유행의 기원을 되짚어보자. 또래에서 잘나가는 친구의 스타일은 전체의 스타일을 선도하기 마련이다. 성격이 털털해서 인기도 있고 심지어 시각적 매력조차 갖춘 친구. 개인적 사정은 모두 다르겠지만, 더 나은 처지를 바라는 희망 속에서 ‘하얀 피부는 물론 트러블 케어까지 해주는’ 무기는 ‘머스트해브’(must-have) 아이템이다.

그렇지만 성적이 안 좋거나(혹은 공부를 안 하거나) 타인을 따라 한다는 사실은 문제적 현상의 원인이라기보다 결과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그들이 머리를 가꾸고 손톱을 손질하고 화장하는 이유는 지레짐작만으론 알기 어렵다. 심지어 그들 자신조차 이유를 추궁당하면 대답하기 만만치 않다. “화장을 왜 하니?” “그냥….” 그들은 자신에게 금전이 주어지는 한 거의 자동적으로 곳곳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뷰티숍에서 상품을 구입한다.

외모를 가꾸는 행위가 의미 있는 타자, 나아가 사회적으로 일반화된 타자로부터 인정받기 위한 어필이라는 점을 상기해보자. 그들은 과연 누구와 커뮤니케이션하는 것일까. 현재 교제 중인 이성 친구? 혹은 언젠가 이뤄질지 모르기 때문에 잘 보여야 할 누구? 그러나 이성 친구라는, 즉 직접적으로 대면한 누군가만을 이유로 삼기에는 여전히 설명이 미덥지 않다. 이성 친구가 없더라도 그들은 계속 치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비밀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지만 애써 꺼내놓지 않으려는 것에 있다. 주지하듯이, 입시체제와 그 대리기구로서의 학교는 성적이 하위권인 학생들에게 문화적 보상을 확실히 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욕설과 체벌…. 작은 잘못에도 뇌리에서 떠나지 않을 모욕을 당하기 일쑤다. 덧붙여, 그가 가족에게도 문화적 위안을 받지 못하고 설상가상 가부장주의적 억압과 고통을 받고 있다면?

이 모든 상황을 피하거나 그에 맞서려면 소녀들은 무장해야 한다. 학교로부터 벗어나 학생이 아닐 수 있는 길, 집에서 벗어나 성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길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 교복 치마 길이가 짧아지고 화장이 짙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물론 소녀들은 사회적으로 미성년이지만, 문화적·심리적으로는 충분히 성인이 될 수 있다.

소녀들의 뷰티 문화가 숨겨둔 블랙박스 속에는 당대의 현실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들은 유행의 무비판적 추종자라기보다 현실을 살아내는 사람들일 뿐이다. 그런 까닭에, 더 나은 삶을 위한 문화적 무장은 계속된다.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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