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여의도 국민은행 앞. 국회 본관이 위엄을 드러내며 굽어보는 길옆으로 남루한 천막 하나가 서 있다. 천막 옆 학사모를 쓴 마네킹에는 고등교육법 개정으로 대학강사의 교원 지위를 회복해 대학 교육을 정상화하자는 손팻말이 걸려 있다. 비닐을 열고 허리를 굽혀 안을 들여다보니 초로의 부부가 환하게 손님을 맞는다. 노동운동가 출신으로 대학에서 한국노동사를 가르치는 김영곤(63)교수와 중국근대사를 전공한 전 한성대 대우교수 김동애(65)씨다. 그들은 무려 1271일 동안 이 천막을 지켜왔다. 이 부부는 무엇을 위해 천막에서 네 번째 겨울을 나고 있는 걸까?
1968년 고려대 경제학과에 입학한 김영곤씨는 고향에서 수재 소리를 듣던 농촌 출신 대학생이었다. 책을 읽으며 철학적인 삶을 살고 싶었던 평범한 대학생은 한 선배가 마련한 독서모임에 참여하면서 세계와 현실에 대해 색다른(?) 눈을 뜨게 된다. 흔히 말하는 ‘의식화’였다. 때는 제1차 경제개발계획으로 도시 노동자가 급증하던 시기. 경제개발의 그늘에서 신음하는 노동자들을 보면서 그들이 처한 현실에 대해 고민하던 김씨는 전태일 열사의 분신 사건을 접한 뒤 노동현장으로 가게 된다. 이른바 ‘노동운동 1세대’의 출현이다.
“현장으로 간 건 검거를 피하려는 이유도 있었어요. 1971년 10월 초 학교에서 박정희 독재를 비판하는 화형식 집회를 열었어요. 그 일이 있은 뒤 검거령이 내려져 도망치듯 그 이듬해인 1972년 1월 서울 구로공단에 기능공으로 숨었어요. 고졸이라고 속이고 위장취업을 했죠.”
당시는 박정희 정권이 유신을 위한 사전 정지 작업으로 반대세력에게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던 때였다. 중국어 공부 모임에서 우연히 알게 돼 집에 바래다주는 사이였던 지금의 아내 김동애씨는 졸지에 수배자를 남친으로 둔 여자가 됐다. ‘스펙’ 좋은 남친도 보란 듯이 취업 안 되면 이별하는 요즘 세태에 비춰 대학을 때려치고 기능공이 된 당시의 남친이 어땠을까?
“그냥 이 사람이 이해됐어요. 저도 유신이 되고 나서 해외 유학을 포기했거든요. 이런 상황에서 나만 살겠다고 유학을 가는 게 좀 그랬어요.”
지금의 눈으로 보자면 분명 이상한 연애다. 김동애씨는 1974년 5월 수배자 남친이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자 본격적인 옥바라지에 나서는 것도 모자라, 그해 11월 출소한 남친과 이듬해인 1975년 2월 백년가약을 맺는다. 신혼의 달콤함도 잠시, 결혼한 지 9개월 만에 새신랑은 이제 징역이 아닌 군대에 끌려간다. 짧디짧은 신혼이었다. 불온사상(?)을 포지한 채 방위병으로 14개월 동안 서울 성북경찰서 무기고(!)를 지키고 제대한 남편은 냉동기능사 자격증을 따 1978년 봄 인천 대우중공업에 냉동주임으로 취업했다. 사상 전력을 숨기고 사는 삶이었지만 월급도 꼬박꼬박 나오고 숙련노동자로서 그나마 안온한 시절이었다.
박정희가 죽은 뒤 등장한 전두환 정권은 수형 전력이 있는 간부 노동자를 해고하는 것으로 노동자들에 대한 적대감을 또렷이 드러냈다. 전과가 있던 김영곤씨는 1981년 9월 대우중공업에서 강제 해고를 당해 거리로 나앉았다. 해고는 그가 직업적 노동운동가의 길을 걷게하는 계기가 됐다. 1984년 안산 반월공단의 알루미늄 새시 공장에 취직해 비밀리에 노동조합 결성 활동을 한 그는, 안산 반월공단 노동자 권익투쟁위원회와 반월공단 노동상담소에 관여하면서 부당한 처우를 당한 노동자들을 도왔다. 1987년 초의 일이었다. 그러다 반월공단에서 농성형태를 띤 파업이 일어났다. 검거령이 떨어졌다. 그는 다시 수배자의 길을 나섰다.
쫓기는 생활 동안 그는 지인의 집을 전전하며 지냈다. 한 지인의 아파트에선 작은 방에 숨어지내며 시간을 정해 운동과 공부를 병행했다. 맨손체조로 체력을 기르고, 독학으로 영어를 마쳤다. 처자식과 떨어져 남의 집에 얹혀 살았던 그 시절을 그는 어떻게 기억할까?
바람난 부부라는 경찰의 오해“외로웠지만, 외롭지 않은 시절이기도 했어요. 도움을 주신 분이 참 많았거든요. 살 집을 마련해주거나 용돈을 대주고, 아이들 학비도 도움을 받았거든요. 그때 신세를 진 분들 가운데 돌아가신 분도 많은데, 지금 생각하면 결과적으로 내가 그 분들을 이용만 한 건 아닌지 반성도 들어요. 운동을 통해 ‘사회적으로’ 갚는다고 생각하지만, 그 분들이 직접 느끼진 못할 테니 그저 고맙고 죄송하죠.” (실제 그는 14년 동안 학교 후배가 마련해준 아파트에서 공짜로 살아오다 최근 고향인 충남 당진으로 이사를 갔다.) 직업이 운동가였던 수배자 남편을 둔 까닭에 생계는 온전히 김동애씨의 몫이었다. “지금에야 하는 말이지만, 사실 너무 힘들었어요. 남편 말처럼 도움주는 분들이 없었다면 살 수 없었을 거예요. 다시 살라고 하면 못 살거 같아요.” (웃음)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다. “석 달 만에 만난 아내와 이야길 나누려 여관엘 갔어요. 근데 때마침 경찰이 임검을 나온 거예요. 신분증을 보여달라기에, 불심검문을 피하기 위해 평상시 가지고 다녔던 후배 신분증을 불안한 마음으로 꺼내줬죠. 그러자 경찰이 우리를 빤히 쳐다보면서 가정이 있으신 분들이 이게 뭐하는 짓이냐며 욕을 하는 거예요. 저희 부부를 바람난 사람들로 여겼던 거죠.” 아내 김동애씨는 한동안 치욕스러워서 잠도 못 잤다며 억울해했다.
1994년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노운협) 의장으로 일하던 김영곤씨는 경기수원지역 노동자연합의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으로 구속돼 집행유예를 받고 풀려났다가 그 이듬해 노운협의 이적단체 구성 혐의로 다시 검거되는 고초를 겪는다. 세 번째 구속이었다. 집행유예 상태였던 그는 다시 집행유예를 받았다. 이른바 ‘쌍집행유예’였다.
1997년 노동법 날치기에 항의하는 총파업과 민주노총 출범으로 노동운동이 한창 세를 떨칠 때쯤 그는 청춘을 보낸 노동운동판을 떠났다. 26년 만의 일이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며 한국의 노동운동은 비약적으로 성장했어요. 노조가입률은 꾸준히 늘었고, 노동자의 실질임금은 향상됐죠. 그러나 기회는 위기이기도 했어요. 사회운동의 한 축을 담당한 한국 노동운동은 사업장에서 조금 더 많은 임금을 받는 쪽으로 귀결된 거죠. 사회변혁적 노동운동이 설 자리가 별로 없었어요.” 그가 정든 노동운동을 떠나게 된 계기다. 구로공단에 위장취업한 스물네 살의 청년은 어느덧 나이 오십의 중년이 됐다. 차마 버릴 수 없던 희망과 사회변혁적 노동운동에 대한 모색과 전망을 책 세 권에 오롯이 담아 (2005)을 펴냈다.
이야기는 다시 천막으로 돌아온다. 이 부부가 처음 천막을 친 것은 2007년 9월7일이었다. 이주호 전 한나라당 의원(현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이 발의하고 여야 3당(열린우리당·한나라당·민주노동당)이 동의한 ‘고등교육법 개정안’이 그해 5월 17대 국회가 종료하면서 자동 폐기된 데 따른 것이었다. 다른 의원들의 고등교육법 개정안보다 한층 전향적이던 이주호 법안은 강사에게 교원 지위를 주고, 이에 따른 비용을 국가재정으로 일부 부담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열린우리당이 원내 제1당인 노무현 정부였던데다 한나라당도 개정안에 합의한 상황이어서, 그 어느 때보다 법 개정에 유리한 조건이었다. 박정희 정권이 대학을 순치하기 위해 박탈한 강사의 교원 지위를 34년 만에 회복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그렇게 무산되고 말았다.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비정규교수노조)의 이름으로 국회를 압박해 개정안을 재발의하기 위해 국회 앞에 천막을 쳤다. ‘한 달이면 되겠지’ 하고 시작한 농성이었다. 얼마 뒤 운동의 진로를 둘러싼 갈등으로 비정규교수노조가 천막을 떠나고 남은 것은 김영곤씨 부부였다. 그 천막이 4년을 가리라고는 부부는 그때 알지 못했다.
한 달이면 될 줄 알았던 천막농성사실 비정규직의 신분으로 한 강좌에 40만원 남짓한 강사료를 받고, 전국 곳곳을 돌며 생활하는 시간강사 문제는 한두 해만의 문제는 아니다. 대개의 강사들은 이처럼 서러운 ‘보따리장수’ 시절을 겪지만, 일단 교수가 되고 나면 이 문제에 눈을 감거나 침묵한다. 자신도 시간강사 신분인 김영곤씨는 강사 문제가 좀처럼 해결되지 않는 이유로 교수 사회의 외면과 강사들의 침묵을 꼽는다. “안정적인 주류 사회로 편입된 교수들이 다시 강사 문제를 제기해 학교와 학계에 굳이 찍힐 필요가 있겠느냐는 보신주의가 작용하는 거 같아요. 한 달 100만원 정도의 벌이로 어렵게 사는 대다수의 시간강사들도 연대를 통해 문제를 풀기보다, 학교와 교수 사회에 줄을 잘 서 남보다 더 빨리 교수가 되는 게 상책이라며 굴종하는 거죠.” 대학 강사들에 대한 불합리한 처우와 부조리한 조건은 대학 사회의 암묵적인 합의의 결과라는 것이다.
강사 문제 해결에 먼저 뛰어든 것은 아내 김동애씨였다. 한성대에서 7년째 중국근대사를 강의하던 김씨는 1999년 학교 쪽이 일방적으로 ‘대우교수’라는 직함을 없애고 강사료를 절반으로 줄이자 직위해제 및 감봉 무효 청구소송을 냈고 부분승소했다. 김씨는 단순히 강사료의 많고 적음을 떠나 문제는 강사에게 교원 지위를 주지 않는 현행 고등교육법에서 비롯됐음을 깨달았다. 그 깨달음은 결국 그에게 ‘비정규교수노조 교원법적지위 쟁취특별위원회’ 위원장과 ‘대학강사 교원지위 회복과 대학교육정상화 투쟁본부장’이라는 고생뿐인 긴 직함을 선사했다. 노동운동을 떠난 뒤 자신이 쓴 책을 들고 주변의 도움으로 대학 강단에 서게 된 김영곤씨는 대학의 문제가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데 놀라고, 아내가 그동안 겪었을 고통에 놀랐다. 교육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겠다고 생각한 그는, 아내와 함께 교원 지위 회복과 대학 교육 정상화 운동에 뛰어들게 됐다.
매일 승리하는 삶그와 같이 노동운동을 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정치인, 지식인, 명사가 여럿 있다. 천막 속의 그가 그들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다. “가는 길이 달랐던 것뿐입니다. 그들을 원망하거나 지난 내 삶을 후회해본 적은 없어요.” 그의 담담하되 진지한 대답에 질문이 부끄러웠다.
천막이 세워진 지 4년, 세월은 속절없이 흘렀다. 그사이 세상은 많이도 변했다. 노무현 정부는 이명박 정부가 됐고, 여당은 야당이 됐다. 그러나 세상은 딱 그만큼만 변했다. 아니, 변한 것은 없을지 모른다. 아직 봄이 오지 않은 2011년 겨울, 사람들은 여전히 춥고 서럽다. 그리고 천막은 아직도 남아 있다. ‘언제까지 천막농성을 할 거냐’고 아내 김동애씨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끝까지 해야죠. 만약 저희 때에 못 이뤄도 후대가 이루겠죠. 작게 보면 세상이 점점 나빠지는 것 같지만, 크게 보면 그만큼 새벽이 가까이 왔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둠이 가장 짙을 때 새벽이 온다잖아요. 결국은 우리가 이길 겁니다. 강사 문제가 해결된다고 우리 부부가 혜택을 입는 것은 거의 없어요. (현행 대학교수 정년은 65세다.) 자신의 이해가 걸리지 않은 일에 모든 것을 걸고 하는 운동인데 우리가 질 수 있나요. 매일매일 승리하는 삶이죠.”
사랑은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했던가. 한곳을 바라보는 노부부의 의연한 낙관을 마주하고 돌아오는 길, 여의도의 꽃샘추의도 견딜만 했다. 이렇게 봄은 온다.
글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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