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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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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빠이 돈 들여야”

등록 2011-02-11 13:17 수정 2020-05-03 04:26

수영장에서 보이는 세계가 있다. 설 연휴를 맞아서 타이 방콕의 호텔에 머물고 있다. 호텔만큼 철저하게 사람을 ‘계급’으로 나누는 공간도 드문데, 세계인이 몰려드는 방콕은 호텔별로 인종적 구분도 짓는다. 이번에 머문 호텔은 서울의 한강처럼 방콕을 위아래로 나누는 짜오프라야 강변에 있다. 시내에서 떨어진 이런 호텔은 부지런히 시내를 다녀야 직성이 풀리는 동양인, 특히 한국인에게 인기가 없다. 호텔 수영장에서 백인에 둘러싸인 ‘인종의 섬’으로 한가로운 사나흘을 보냈다. 종일 누워서 선탠만 하는 이들만 가득했던 수영장에 갑자기 활기가 돌았다. 설 연휴 전날, 한국인 가족이 도착한 것이다.

너무 지극한 사랑이 보인다

아이들 서넛이 예쁜 수영복에 큰 물안경에 귀마개 달린 수영 모자까지 쓰고 나타났다. 행여나 물에 빠질까 구명조끼도 잊지 않았다. 저토록 철저한 준비성, 한국인 아니면 갖추기 어렵다. 역시나 오랜만에 한국말이 들린다. 아이들은 그토록 철저한 준비가 무색하게 조그마한 어린이용 풀로 직행한다. 성인풀 맞은편에선 서양인 부모가 돌도 지나지 않은 ‘무방비 상태’의 아기를 성인풀에 풍덩풍덩 빠뜨리고 있었다. 한국 애들은 유치원생에서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로 보였는데, 한참 지나자 큰 아이가 ‘용기를 내어’ 성인용 풀장에 들어갔다. 줄곧 아이들 곁을 지키던 엄마가 큰아이를 보면서 말했다. “야, 이빠이 돈 들여서 (수영) 가르쳤는데 개헤엄을 쳐?”
이렇게 한국 부모의 자식 사랑은 어여쁜 수영복, 풀세트 물놀이 기구, 섬세한 돌봄까지 지극정성 3종세트로 완성된다. 그러나 너무 지극한 사랑은 뒤집어 말하면 과보호. 수영장에서 한국인의 아이 기르는 태도가 보인다. 서양인 부모처럼 아이가 물을 좀 먹더라도 물과 자연스레 친해질 기회를 주는 방식은 아닌 것이다. 아이가 나와 다른 독립적 인격체라기보다는 내가 끝까지 책임질 존재란 부담이 여기서도 보인다. 그러니 일상부터 일생까지 책임진단 보험 광고는 아이를 기르는 태도와 다르지 않다. “이빠이 돈 들여” 학원·대학 보내는 일까지 모조리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이를 낳는 일이 오죽 부담스럽겠는가. 말해서 무엇하랴. 한국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모든 부담을 개인에게 전가하는 사회가 아니던가.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저출산은 산업화된 나라들의 문제로 생각되지만, 좁혀서 말하면 동아시아 문제다. 195위 마카오, 194위 홍콩, 192위 한국, 184위 일본, 154위 중국, 143위 타이…. 유엔이 발표한 2005~2010 세계 출산율 통계에서 동아시아 국가가 바닥을 ‘깔아주고’ 있다. 195개국 대상의 통계니 저출산 순서로 마카오 금메달, 홍콩 은메달, 한국 4위다. 이상하게 이 통계에서는 빠졌는데, 주한 대만대표부는 대만의 출산율이 한국을 앞질렀다고 ‘자랑’하는 보도자료를 보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타이 같은 나라는 개발도상국가인 상태에서 고령사회로 진입한단 것이다. 타이의 출산율은 1.85명인데, 이것은 여성 1명이 아이 2명도 낳지 않는다는 뜻이다. 개발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성장의 동력이 멈춰서는 것이다. 타이의 중산층은 한국인 못지않게 교육열을 자랑한다. 출산율 2.14명으로 119위인 베트남도 타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렇게 자식에게 인생의 모든 것을 거는 동아시아 사회에서 저출산은 유독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경쟁이라면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문화권인 동아시아가 저출산병을 앓는 것이 우연일까.

이민이 고령사회 구조한다

아이들이 수영장을 습격한 다음날, 방콕 인근 유적지에 다녀오는 유람선을 탔다가 식사 시간에 인도네시아 메남에서 온 커플과 얘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시간이 조금 지나자 남성이 조심스레 물었다. “동남아시아, 특히 베트남 여성과 결혼하는 한국인 남성이 많다고 하던데, 그것이 사회적 문제인가?” 이른바 ‘선진국’ 중 일본만 심각한 고령화 문제를 앓는 이유는 선진국 가운데 대규모 이민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일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심각한 저출산율에 배타적인 이민 문화까지 겹치면, 일본은 한국의 미래다. 출산율을 높이는 것은 하루이틀에 해결 가능한 문제가 아니다. 단순화하면, 이제 우리는 이민을 받아들이느냐 고령사회로 속수무책 가느냐, 갈림길에 놓였다. 상식적인 정치라면, 얼마나 이민을 받아들이고 어떻게 이주민에 대한 차별을 없앨 것인가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더하면, 부모의 너무 지극한 자식 사랑은, 이제 그만~ 이제 그만~. 자식들도 자라면, 너무 지독한 사랑은 ‘노 땡큐’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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