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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 해피 해피 크리스마스

등록 2010-12-22 16:06 수정 2020-05-02 04:26

곧 크리스마스다. 12월17일 새벽, 마감 때문에 집에도 못 들어가고 회사 숙직실에서 뒤척이던 때 서울엔 많은 눈이 내렸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일주일 앞서 그리며 마음이 들뜬다. 달력에 빨간 글씨로 새겨진 12월25일은 우리 고유 명절도 아니고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의미 있는 기념일도 아니지만, 왠지 아련한 그리움과 설렘으로 일주일 정도의 시간을 앞질러 다가오는 신비한 힘을 지녔다. 그래,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오길. 세 가지 소원을 빈다.

1. 이 글을 쓰고 나서 맞게 될 주말에 연평도에서 포사격 훈련이 진행된다고 한다. 군 당국은 12월18~21일 사이 날씨가 좋은 날에 훈련을 하겠다고 밝혔다. 북한군은 남북 장성급 회담 북쪽 단장 명의의 통지문을 통해 “우리의 사전 경고에도 연평도 포사격을 강행할 경우 우리 공화국(북) 영해를 고수하기 위해 2차, 3차의 예상할 수 없는 자위적 타격이 가해질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 12월15일 20~30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민방위 훈련을 겪고 난 터라 두려움은 더욱 크다.
이런 엄중한 시기에 이명박 대통령은 육군참모총장을 갈아치웠다. 고작 6개월 전 그를 임명할 당시에도 충분히 알려졌다고 하는 부동산 투기 의혹을 내세워 육군총장의 옷을 벗긴 뒤 자신의 고교 후배를 그 자리에 앉혔다. 군 내부에서는 불만의 소리가 높다고 한다. 천안함 침몰 때나 연평도 포격 사태 때 군의 사기를 걱정하던 대통령이 아니던가. 하필 지금 같은 시기에 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무리한 인사를 단행하다니, ‘나라가 어찌되든 우리 사람부터 챙기고 보자’는 심산이 아니라면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일이다. 어찌됐든, 새 육군총장이 승진의 기쁨에 취하지 않고 결연한 대비태세를 취해주길 바랄 뿐이다.
그보다 더 큰 바람은 북쪽의 엄포가 그야말로 엄포에 그치는 것. 첫 번째 절실한 소원이다.

2. 이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국가인권위원회가 주는 ‘10대 인권보도상’ 수상자로 선정됐다고 한다. 803호부터 연재한 ‘대한민국 영구 빈곤 보고서’ 시리즈가 인권위의 눈에 들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은 지난해에 이어 수상을 거부하기로 했다. 인권을 옹호하기는커녕 걸림돌이 되고 있는 현병철 인권위원장의 사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더욱 높아진 지금, 지난해 ‘만리재에서’를 통해 밝혔듯, “인권위로부터 받는 작은 칭찬은 지금의 인권 현실에 대한 모욕이 될 수도 있다”고 여전히 느끼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가 오기 전, 현 위원장이 자진 사퇴의 뜻을 밝힌다면, 길 잃은 대한민국의 ‘인권’에게 소리 없이 쌓인 오늘 새벽의 눈처럼 청명한 소식이 될 텐데.

3. 지난호부터 빈곤층의 슬픈 죽음을 돌아보는 ‘생명 OTL- 빈곤과 죽음의 이중나선’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그렇잖아도 씁쓸한 세밑을 보내야 하는 독자들께 너무 침울한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을 했는데, 내년도 예산안 날치기 통과로 가뜩이나 힘겨운 우리 이웃들의 삶이 더 벼랑 끝으로 몰리는 현실을 보면서 그런 알량한 우려는 접기로 했다. 방학을 맞아 더 이상 학교에서 급식을 먹을 수 없는 아이들에게 거친 끼니나마 마련해주는 방학 중 결식아동 지원 예산을 ‘0원’으로 만든 집권세력의 짐승 같은 태도에서 우리 사회 전반에 드리운 죽음의 짙은 그림자를 보기 때문이다. ‘형님 예산’이니 ‘마님 예산’이니 하는 풍족한 예산 항목들까지 볼라치면 그들은 짐승 이하의 어떤 것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나라가 어찌되든 우리 사람부터 챙기고 보자’는 검은 마음이 아니라면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일이다.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처럼 살다 갈 수 있는 세상. 그런 세상은 어여쁜 크리스마스 카드 속에나 존재하는 것일까. 배고픈 아이들의 크리스마스 꿈에나 존재하는 것일까. 산타 할아버지의 썰매가 출발한다는 북구의 어느 나라만큼은 아닐지라도,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에게도 최소한의 인간적 삶이 보장되는 복지 시스템을 우리도 갖추고 싶다고 산타 할아버지께 빈다. 너무도 당연한, 그러나 간절한 소원.
한겨레21 편집장 박용현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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