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극장에 갔다. 저녁을 먹다가 반주를 한잔 걸치다가 이아무개 팀장이 던진 유혹에 모두가 즐거이 낚였다. 택시를 타고 가장 가까운 영화관으로 달려가, 다행히 관객이 드문 객석 한 귀퉁이에 몰려앉아 술 냄새를 부여잡으며 영화를 봤다. . 지난호 레드면에 리뷰가 실린 영화다. 기사는 영화의 주요한 반전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는데, 잡지를 만들려면 아무리 엄청난 스포일러가 들어 있어도 안 읽어볼 수 없는 게 편집장의 운명이겠거니 하며 꼼꼼히 읽어봤더랬다. 그렇게 마지막 반전 장면이 머릿속에 고스란히 들어 있는데도, 영화는 그 장면에 도달할 때까지 한순간도 집중을 흐트러트리지 않을 만큼 흡인력이 있었다.
이렇게 재미있게 본 를 가장 재미없는 방식으로 요약하자면, 무고한 범인을 양산하는 경찰의 성과주의와 기득권층 보호에 여념이 없는 검찰의 행태, 인간미를 상실한 토건자본의 폭력, 주는 것만 받아먹는 언론의 비겁함이 얽히고설킨 세계를 그린 영화다. 영화 속 세계에서 그들 모두는 양아치다. 우연히도 시의적절한 설정이라고 해야 할까, 영화에는 이른바 ‘대포폰’도 사건 전개에 중요한 장치로 등장한다. 허구의 이야기지만, 요즘 세태에 대한 풍자로 읽는 재미도 쏠쏠했다.
현실로 돌아오면, 공직 기강을 세운다는 국무총리실 직원이 민간인을 불법사찰해 사지로 몰아넣고 검찰은 이런 사실을 알고도 수사를 지연시켜 증거인멸의 시간을 벌어주고 그사이 국무총리실 직원은 불법사찰 자료가 들어 있는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전문 업자에게 부탁해 파기하고 그 와중에 청와대 직원은 국무총리실 직원에게 대포폰을 사줘 증거인멸 과정을 도왔다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수많은 사건을 취재해본 처지지만, 이렇게 흥미진진한 사건 구성은 처음이다. 게다가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유치해 명실상부한 국제사회의 ‘룰메이커’(Rule-maker)가 됐다는 정부의 선전이 배경으로 깔리니, 더욱 완벽한 시나리오가 아닌가. 양아치 세상, 서울은 전세계 정상들을 환영합니다.
에서 최후의 약자이자 피해자로 남는 것은 아동 연쇄살인범에게 희생당하고 유린당하면서도 어른들의 권력 놀음 속에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하는 어린이로 그려진다. 현실의 영화에서는? 추문에 발 담근 아빠들의 아이들이 아닐까. 얼마 전 이 지면에서 “아빠가 나쁜 일도 한다는 걸 너는 몇 살 때 알았어?”라는 질문을 두고 이야기한 것처럼, 청와대나 검찰 같은 ‘자랑스러운 직장’에서 일하는 아빠가 나쁜 일을 하기도 하고 나쁜 일을 눈감아주기도 한다는 걸 알아버리는 아이들이 가장 큰 희생자가 아닐까. 가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이라면, 작금의 대한민국 현실은 ‘아빠가 나쁜 짓도 한다는 걸 아는 나이 이상 관람가’ 등급이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 근처 허름한 홍합탕집에서 찐득찐득 달라붙는 영화의 쓴 뒷맛을 떨쳐내며 밤늦도록 쓰린 속을 달랬다. 날씨가 부쩍 추워졌다. 엔딩 자막이 언제 올라갈지 기약 없는 영화 속에서, 옷깃을 세운 일행은 별다른 대사도 없이 서로의 귀갓길에 안녕을 빌었다.
한겨레21 편집장 박용현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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