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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거21] 연대와 이별하라 하는 시절

등록 2010-08-03 21:12 수정 2020-05-03 04:26
‘아듀… 평화인권연대’. 염창근 제공

‘아듀… 평화인권연대’. 염창근 제공

 

10여 년이 흘렀다. 여전히 그 세대에 속해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그들을 친구라 부르지 못해도, 그들에게 마음을 의지해 버틴 한 시절이 있었다. 1990년대 초·중반에 대학을 다닌 ‘낀 세대’. 새내기 1991년, 강경대의 거리가 있었다. 노동과 통일의 전통이 있었다. 소련이 무너졌고, 혁명도 멀어졌다. 1990년대 초·중반 당시엔 ‘신사회운동’이라 불린 여성·환경·국제·평화·인권 같은 운동 주제가 ‘수입’됐다. 다행히 나는 인권과 환경과 평화를 자습과 세미나 같은 대학의 비정규 과정에서 글로 배운 첫 세대일 것이다.

혹시나 내가 쓴 기사에 약간의 새로움이라도 있었다면, 그것은 글로 배운 평화와 인권과 환경과 여성과 소수자를 운동으로 살았던 이들 덕분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들어갔다. 머리에는 는 책 제목이 떠나지 않았지만, 다르게 살 용기는 없었다. 그래도 다르게 사는 또래가 있어서 위안이 되었다. 나의 세대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인 1990년대 후반 만들어진 ‘국제연대정책정보센터’ ‘평화인권연대’ ‘청년생태주의자 KEY’ 등등등. 다르게 사는 이들의 이름이었다. 회사가 제공한 컴퓨터로 업무시간 틈틈이 진보넷 참세상에 들어가 그들의 활동을 염탐했다.

어쩌다 기자가 되었다. 흠모의 이름들을 만날 기회가 생겼다. 기자는 기록하는 자일 뿐. 그저 그들의 일과 말을 받아서 정리만 하면 기사가 되었다. 386세대의 기자라면 친구를 만나서 듣기 어려운 얘기들, 그런 것이 시장에서는 때때로 ‘신상’으로 유통됐다. 양심적 병역거부 기사도 평화인권연대의 ‘오리’를 만나지 않았다면 쓰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을 떠올리면, 별명과 자전거가 따라온다. 오리라는 최정민의 별명처럼, 그들은 서로를 ‘주어진’ 이름이 아니라 ‘만든’ 별명으로 불렀다. 단체 대표나 사무국장 같은 위계도 없었다. 활동가 다수는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그렇게 그들은 진보를 ‘살았다’. 아, 재정이 열악한 그들은 때때로 같은 공간을 나누어 썼다.

오래전에 국제연대정책정보센터와 KEY가 해체했다. 단체가 끝났다고 운동이 끝나지는 않았다. 거기서 일했던 이들의 이름을 여기저기서 아직도 만난다. 며칠 전에 받은 소식지 의 표지엔 ‘아듀… 평화인권연대’라는 제목이 있었다. 평화인권연대 활동가들이 들으면 웃을 얘기지만, 순간 울컥했다. 마지막 글에서 오리는 해산도 자연스러운 과정의 일부라고 썼다. 오랜만에 그에게 얼굴이나 보자고 휴대전화 문자를 보냈다. 여러 이별이 자꾸만 오는 시절이다. 슬프지 않으려고 애쓴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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