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의 월드컵 중계방송을 보면서 한 가지 참 잘하는 게 있다고 느꼈다. 경기 시작 전 국가가 연주될 때 그 가사를 번역해 자막으로 보여준 점이다. 낯선 나라들의 낯선 국가를 그저 스쳐듣지 않고 가사를 음미하며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가사들에서 낯설지 않으면서도 낯선 단어들을 발견하고는 어떤 낯선 감정을 느끼기도 했다.
예를 들면, 우리 국가대표팀이 16강 진출을 확정지은 조별예선 3차전 상대국 나이지리아의 국가는 이렇게 노래한다. “자유와 평화, 통일로 하나 된 나라를 위한 우리의 영웅적 선조들의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으리라. …창조주여, 우리에게 고귀한 대의를 지키도록 하시고, 우리 지도자들을 올바른 길로 이끄시고, 우리 젊은이들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고 사랑과 정직 속에 자라서 공정하고 진실한 삶을 살아… 마침내 평화와 정의가 지배하는 나라를 건설하게 하소서.” 우리에게 쓰라린 패배를 안겨준 아르헨티나 국가는 강렬한 감탄사로 시작한다. “사람들이여! 저 성스러운 울부짖음을 들으라. 자유! 자유! 자유!… 고귀한 평등이 왕좌에 오른 것을 보라.” 우리의 첫 제물이 됐던 그리스의 국가도 “만세! 자유여! 만세!”로 끝맺는다. 운명적인 16강전 상대 우루과이 선수들은 이런 국가를 들으며 전의를 다졌다. “우루과이인이여, 조국이 아니면 죽음이다!… 자유가 아니면 영광스러운 죽음을. 이는 우리의 영혼이 선포한 바 우리가 영웅적으로 지켜낼 맹세이니. …독재자들을 떨게 하라. 우리는 전투 속에서도 자유를 외치리라! 죽어가면서도 또한 자유를 외치리라!”
자유, 평등, 독립, 정의, 평화 그리고 이를 위한 투쟁. 마치 1980년대 민주화를 위해 거리로 뛰쳐나간 이들이 부르던 노래를 듣는 듯하다. 군사독재 정권에 항거하던 민주단체가 낸 성명서를 보는 듯하다. 독립운동가들이 비밀결사를 맺으며 비장하게 낭독하던 맹세문을 읽는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대다수 근현대 국가가 탄생한 배경에는 독립전쟁과 혁명과 민주화 투쟁이 자리잡고 있다. 건국 이후 실제 정치 상황이 어떻게 전개됐는지는 별개의 문제로 치더라도, 적어도 대다수 국가(國家)의 태반에는 자유·민주·평등·평화의 정신이 깃들어 있었고 그것이 국가(國歌)에 오롯이 새겨졌다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이 겪은 건국의 전후사도 이와 다르지 않은데, 우리의 애국가는 어쩐지 밋밋한 맛이다. ‘고귀한 대의’에 대해서도, ‘성스러운 울부짖음’에 대해서도, ‘영웅적 맹세’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한국대표팀의 선전과 거리응원의 열정에 감동하면서도 아쉬움이 들었던 대목이다. 우리가 ‘대~한민국’을 외칠 때, 그 대한민국은 어떤 대의에 바쳐진 나라이며, 우리는 어떤 고귀한 이상을 향해 울부짖고 있으며, 마음속에 어떤 떨림의 맹세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유, 평등, 독립, 정의, 평화 그리고 이를 위한 투쟁. 너무나 격조했던 단어들이다. 낯설고 반갑다. 국가가 연주될 때마다 이런 단어들로 흐트러진 정신을 깨울 수 있다면 참 좋은 일일 것이다. 그런 국가라면 매일 아침 출근해서 한 번씩 부르고 싶을 정도다. 그런 국가를 부른다면 우리나라의 지도자라는 자들도 좀더 올바른 길로 인도되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국무총리실 소속 공직윤리지원관실이란 곳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비판하는 동영상을 블로그에 올린 민간인을 사찰했다. 천안함 사건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거나 장난기 어린 문자메시지를 보낸 이들이 형사처벌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소득양극화와 지역 불균형을 치유할 주요 수단인 조세정책은 오히려 역주행하고 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외국 군대에 전시작전통제권을 넘겨주고 있는 우리 정부는 그 권한의 반환 시기를 연기하려고 안달이다. 이런 와중에 우리는 월드컵 경기를 본다. 애국가가 울려퍼진다. ‘대~한민국’을 외친다. 환호와 함성은 흐린 하늘 속으로 공허하게 흩어진다.
편집장 박용현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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