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거21] 4시30분 비문.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그날은 아침에 비문이 들어섰다. 오른쪽 눈 윗부분이다. 눈알을 굴리면 따라다녔다. 굵은 가지에 가는 가지가 늘어졌다. 비문은 날파리증이라고도 한다. “눈에 날파리가 날아다녀요” “눈에 거미가 든 것 같아요”라며 증상을 호소한다. 날파리냐 거미냐는 무늬에 따라 다를 것이다. 눈을 쳐서라도 때려잡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비슷하다. 중년 이후 별다른 원인 없이 나타날 수 있다고 안과 사이트에 나와 있다.
‘표지이야기’ 대장(편집과 디자인이 완성된 상태의 원고)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만화책을 봤다. 캐나다 일러스트레이터 기 들릴이 ‘국경 없는 의사회’ 소속 아내를 따라 버마에 가서 겪는 일을 그린 만화다. . 예전에 20쪽을 읽고 8줄 서평을 썼다. 출판 단신 기사를 쓰면서 책을 다 읽는 경우는 없다. 주로 보도자료를 베낀다. 8줄이면 되니까. 보도자료가 요약이 잘 돼 있으면 책을 보지 않고도 쓴다. 책보다 보도자료가 좋은 경우도 있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다. 만화에는 버마 군부의 언론통제가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서방에서 왔으니 보던 걸 못 봐 답답함이 클 것이다. 날씨는 덥고 신문은 구멍이 난 채 배달된다. 그가 있을 때 외국 영화도 완전 통제됐다. 표지이야기 대장이 나왔다. 취재기자에게 최종 확인하라고 넘긴다. 비문은 그대로다. 새벽 1시45분.
취재기자는 대장 확인을 끝낸 뒤 사라졌다. 사무실은 텅 비었다. ‘만리재에서’도 미리 출고해놓고 편집장은 ‘스핑’하고 있다(‘스핑크스’라는 회사 앞 술집에서 술을 마시는 행위·‘참새 스핑’이라는 속담이 있다). ‘마감주’를 먹은 동지들이 들어온다. 편집장은 표지이야기 대장에 OK를 쓰고 나간다. 를 다시 펴든다. 쇼핑몰에서 폭탄이 터졌다. 국경 없는 의사회 전자우편은 검열당하고 있다. 컬러 대장(최종 확인된 대장을 컬러로 프린트한 것)이 들어온다. 3시8분. 배열표에 마지막 확인 시간을 적는다.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온다. 맥주를 마신다. 냉장고에는 어묵 조림이 있다. 비닐에 든 걸 반찬통에 넣고 젓가락을 챙겼다. 거실에 있는 책을 아무거나 집어들었다. 소설책을 읽는다. 한밤의 텔레비전은 민망했다. 4시30분. 옆의 절에서 목탁을 두드렸다. 곧 닭이 울었다. 날이 밝았다. 두 캔째 맥주가 다 비워졌다. 한입 베어놓고 한쪽에 두었던 어묵 반쪽을 집었다. 젓가락을 빠져나간 어묵이 탁자에 한 번, 바닥에 한 번 부딪쳤다. 공은 아니니까 더 튀기지는 않았다. 그걸 집어들어 먹었다. 새벽까지도 비문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문득 생각했다. 기다리는 게 싫지는 않았고 새벽은 좋았다.
자리를 옮겼다. 2005년 4월부터 5년간의 편집팀 생활을 정리하고 이번주부터 문화팀에서 일한다(사무실 자리는 그대로다). 이제 출판은 신소윤 기자가 담당한다. 그간 보도자료를 베끼게, 잘 써준 출판사들에게 고맙다.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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