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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거21] 사라진 평온

등록 2010-06-02 21:19 수정 2020-05-03 04:26
‘지평리 전투 재현행사’ 열린 경기 양평군 지평면 지평리에서 26일 오전 20사단 병사들이 지평리전투를 재현하고 있다. 지평리전투는 지난 1951년 2월 미 23연대 전투단에 배속된 프랑스군 1개 대대가 중공군 3개 사단 3만여명과 싸워 승리한 전투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지평리 전투 재현행사’ 열린 경기 양평군 지평면 지평리에서 26일 오전 20사단 병사들이 지평리전투를 재현하고 있다. 지평리전투는 지난 1951년 2월 미 23연대 전투단에 배속된 프랑스군 1개 대대가 중공군 3개 사단 3만여명과 싸워 승리한 전투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서른 중반이 넘도록, 체감하길 지금만큼의 남북 긴장은 없었다. 1994년 ‘당나라 부대’라 불리던 ○○사단(나는 군사기밀을 존중한다)에서 포병으로 복무하던 친구가 예정했던 휴가를 나오지 못했다. 그해 7월 김일성 북한 주석이 사망한 탓이다. 친구가 ‘날벼락’이라며 전한 소식을 난 귓등으로 들었다.

연도도 가물거리는 북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핵실험, 하와이까지 날아갈지 모른다고 보도됐던 미사일 위협, 연평대전…. 기억이 참 없다. 늘 태평이었다. 어느 때부턴가 사재기가 사라진 것만은 기억한다.

딱 한 번 긴장을 뼛속에 새긴 적 있었다. 1996년 9월 강릉 무장공비 침투 때 일병 5호봉이었다. 북한 특수부대원 26명이 좌초된 잠수함을 버리고 뭍으로 쳐들어왔다. 복무하던 춘천 지역을 수색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아군이 아군을 쏘았다는 전방 쪽 이야기도 들려왔지만, 그래도 동료들에 의해 진압되고 적이 몇 남지 않았던 때다. 무전기를 메고 하루 3곳 안팎의 산을 들쑤시고 다녔다. 정말 입에서 단내가 났다. 다들 총 하나만 들고 있는데 내 등에만 무전기가 올려져 있다며 아침부터 밤까지 배배 꼬인 몸뚱아리에선 군내까지 났다. 그런데 막상 산 깊숙한 데서까지 평온하기 이를 데 없는 화전농, 심마니, 등산객 등을 마주치곤 ‘이분들 뭐하나’ 혼란스러웠다. 중대장도 며칠 뒤부턴 더덕을 캤다. 더덕 찾아 날다람쥐처럼 뛰어다니는 중대장을 쫓느라 ‘무전병’은 코피까지 쏟고 말았다.

아, 말이 샜다. 그러니까 그 긴장감을 또렷이 기억하는데, 맞다, 병장 때다. ‘전투태세 대기’라는 듣도 보도 못한 지시가 내려왔다. 밤 11시께였다. 대대장까지 부대로 들어왔다. 적이 휴전선 아래로 움직인다는 말이 장교들 사이에서 오갔다. 군장을 갖추고 전투화까지 신은 채 침상에 앉아 1~2시간을 꼬박 대기했다. 때때로 하던 ‘비상집합’과는 격이 달랐다. 새벽, 상황은 해제됐지만 정말 전투나 전쟁이 날 것으로 알았다. 뒤에 들린 말로는, 새로 부임한 (아마도) 군사령관이 철저히 비밀에 부친 채 시행한 훈련이었단다.

그때만큼은 아니지만, 요즘 ‘정말 전쟁이 난다면’이란 생각을 한다. 긴장도 좀 한다. 왜 그래야 하는지 이해를 못한 채 말이다. 대놓고 민에게 희생의 각오를 강요하는 분위기를 본다. 군은 긴장하더라도, 민은 평온하던 한철은 사라졌다. ‘적’을 55km 밖 머리 위에 이고 사는 조국이란 사실을 잊고 있었기 때문인지, 우리 군이 허약하다는 걸 새삼 알았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아님 혹시 6·25 때 쓰던 칼빈(총)을 들어야 하는 ‘민방위’로 편제된 때문인가.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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