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중반이 넘도록, 체감하길 지금만큼의 남북 긴장은 없었다. 1994년 ‘당나라 부대’라 불리던 ○○사단(나는 군사기밀을 존중한다)에서 포병으로 복무하던 친구가 예정했던 휴가를 나오지 못했다. 그해 7월 김일성 북한 주석이 사망한 탓이다. 친구가 ‘날벼락’이라며 전한 소식을 난 귓등으로 들었다.
연도도 가물거리는 북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핵실험, 하와이까지 날아갈지 모른다고 보도됐던 미사일 위협, 연평대전…. 기억이 참 없다. 늘 태평이었다. 어느 때부턴가 사재기가 사라진 것만은 기억한다.
딱 한 번 긴장을 뼛속에 새긴 적 있었다. 1996년 9월 강릉 무장공비 침투 때 일병 5호봉이었다. 북한 특수부대원 26명이 좌초된 잠수함을 버리고 뭍으로 쳐들어왔다. 복무하던 춘천 지역을 수색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아군이 아군을 쏘았다는 전방 쪽 이야기도 들려왔지만, 그래도 동료들에 의해 진압되고 적이 몇 남지 않았던 때다. 무전기를 메고 하루 3곳 안팎의 산을 들쑤시고 다녔다. 정말 입에서 단내가 났다. 다들 총 하나만 들고 있는데 내 등에만 무전기가 올려져 있다며 아침부터 밤까지 배배 꼬인 몸뚱아리에선 군내까지 났다. 그런데 막상 산 깊숙한 데서까지 평온하기 이를 데 없는 화전농, 심마니, 등산객 등을 마주치곤 ‘이분들 뭐하나’ 혼란스러웠다. 중대장도 며칠 뒤부턴 더덕을 캤다. 더덕 찾아 날다람쥐처럼 뛰어다니는 중대장을 쫓느라 ‘무전병’은 코피까지 쏟고 말았다.
아, 말이 샜다. 그러니까 그 긴장감을 또렷이 기억하는데, 맞다, 병장 때다. ‘전투태세 대기’라는 듣도 보도 못한 지시가 내려왔다. 밤 11시께였다. 대대장까지 부대로 들어왔다. 적이 휴전선 아래로 움직인다는 말이 장교들 사이에서 오갔다. 군장을 갖추고 전투화까지 신은 채 침상에 앉아 1~2시간을 꼬박 대기했다. 때때로 하던 ‘비상집합’과는 격이 달랐다. 새벽, 상황은 해제됐지만 정말 전투나 전쟁이 날 것으로 알았다. 뒤에 들린 말로는, 새로 부임한 (아마도) 군사령관이 철저히 비밀에 부친 채 시행한 훈련이었단다.
그때만큼은 아니지만, 요즘 ‘정말 전쟁이 난다면’이란 생각을 한다. 긴장도 좀 한다. 왜 그래야 하는지 이해를 못한 채 말이다. 대놓고 민에게 희생의 각오를 강요하는 분위기를 본다. 군은 긴장하더라도, 민은 평온하던 한철은 사라졌다. ‘적’을 55km 밖 머리 위에 이고 사는 조국이란 사실을 잊고 있었기 때문인지, 우리 군이 허약하다는 걸 새삼 알았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아님 혹시 6·25 때 쓰던 칼빈(총)을 들어야 하는 ‘민방위’로 편제된 때문인가.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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