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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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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이 필요하다

등록 2009-11-18 10:33 수정 2020-05-03 04:25

영국 히스로 공항의 소음에 시달리던 인근 주민들이 2001년 유럽 인권재판소에 영국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을 냈다. 밤중에 나는 소음으로 인해 ‘가정·사생활·가족의 삶을 존중받을 권리’를 침해당했다는 이유였다. 유럽 인권재판소 1심 재판부는 5 대 2의 판결로 주민들에게 승소를 안겼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는 12 대 5로 영국 정부의 손을 들어줬다. 쟁점은 주민들이 주장하는 권리와 다른 사람들의 권리, 즉 비행기 승객의 여행할 권리나 항공사의 영업권 등이 충돌하는데 영국 정부의 정책이 이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잡았느냐였다. 항소심 재판부에서 소수 의견을 낸 재판관들은 이렇게 밝혔다.
“인권 보호와 환경 보호의 시급한 필요성이 서로 긴밀히 연결되는 상황에서 우리는 건강이야말로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욕구이며 무엇보다 우선시돼야 한다고 본다. 이 사건에서처럼 밤낮으로 계속해서 또는 주기적으로 비행기 엔진의 소음이 일상을 뒤흔든다면, 가정의 사생활과 관련해 인권이 의미하는 바는 과연 무엇인가.”

이 사례를 소개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인권이라는 개념의 확장을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인권침해라고 할 때 정치적 박해나 공권력에 의한 극악한 신체적 유린만을 떠올리는 시대는 지났다. 가히 ‘모든’ 문제가 인권 문제인 시대다. 공항의 소음 논란을 ‘권리’의 프리즘으로 들여다보는 유럽 인권재판소 판례에서 그런 세계적 흐름을 읽을 수 있다. 이는 이른바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의 강조와 일맥상통한다. 유엔이 내놓은 권리장전의 두 축을 이루는 시민·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과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가운데 후자가 국제사회에서 점점 더 주목을 받고 있다. 이 규약은 식량·교육·건강·주거·노동 등과 관련한 인권을 다룬다. 이 규약이 각 가입국에서 제대로 이행되고 있는지 감시하는 역할을 하는 게 유엔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위원회다. 이 위원회가 지난 11월10~11일 우리나라의 인권 상황에 대한 심의를 진행했다는 소식에 눈길이 가는 이유다. 재개발, 비정규직, 이주노동자, 4대강 사업 등이 모두 국제적 인권의 기준으로 점검받는 자리인 것이다.

둘째, 인권의 국제 기준을 우리 현실에 적용하는 길에 대한 질문이다. 유럽 인권재판소는 유럽연합 가입국들이 세운 법원으로, 역시 유럽 나라들이 만든 유럽인권협약에 근거해 재판을 진행한다. 어찌 보면 각 나라의 내정에 해당하는 문제인데도, 인권의 기준에 따라 독립된 재판소의 판단을 받는 셈이다. 물론 경제·사회·문화적 권리란 것은 일도양단하기 어려운 복잡한 사안이다. 어느 정도 수준까지 보장해야 인권 기준을 충족한 것인지 불분명하고 서로 충돌하는 권리들 사이의 조정도 난해하다. 그러나 각 나라가 처한 조건과 사회적 자원의 한계를 감안해가면서 최소한의 기준을 마련해나가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시스템은 유럽뿐 아니라 미주인권재판소, 아프리카 인권위원회 등 다른 대륙에도 마련돼 있다. 안타깝게도 아시아는 예외여서 우리에게는 아직 낯설게 느껴지는 제도다. 그런 점에서도 한국 인권 상황에 대한 유엔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위원회의 심사는 주목돼야 한다. 비록 유럽 인권재판소처럼 강제력을 갖지 못하는 다소 느슨한 형태의 위원회이기는 하지만, 여기서 심의를 거쳐 내놓는 권고는 동시대의 국제 인권 기준을 반영한 것인 만큼 존중돼 마땅하다. 11월20일 나올 우리나라에 대한 권고 내용에 정부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는 바로 대한민국의 국격을 드러내는 바로미터가 될 것이다.
좀더 연습이 필요하다. 모든 문제를 인권의 프리즘으로 분석하고, 인류가 합의해온 기준을 존중하고, 거기에 우리의 경험에서 우려낸 지혜를 더해나가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대한민국은 ‘국제’ ‘선진’ ‘인권’을 입에 담을 자격을 얻게 된다. 이번호 은 이를 위한 한 권의 연습문제집이라고 해도 좋겠다.
박용현 편집장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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