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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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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사회적 위세


외형적으로 타인과 구별짓는 ‘허세’와 안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위엄’은 서로 달라
등록 2009-11-05 16:47 수정 2020-05-03 04:25

한국의 어느 의상 디자이너는 비싸게 옷값을 받을 수 있는 비결을 가지고 있다. 고객 가운데 저명인사들이 옷을 맞추러 오는 시간을 같은 날 비슷한 때에 배치하는 것이다. ‘우연히’ 마주친 그들은 누구든 금방 얼굴을 알아볼 만한 사람들이기에, 비록 예전에 만나본 적이 없는 사이라 할지라도 자연스럽게 서로 인사를 나누게 된다. ‘유유상종’이라고 해야 할까. 그들은 함께 섞여 있는 사람들의 면면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으로 분류되고 대접받고 있는지를 새삼 확인한다. 그리고 그런 ‘VVIP’(Very Very Important Person의 약자로, 요즘 백화점에서 실제로 쓰이는 말이다)들의 옷을 맞춰주는 디자이너에게 자신의 의상을 맡기기 잘했다는 뿌듯함도 느낄 것이다. 그 디자이너는 그 ‘특별’ 고객들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각각의 옷값을 높게 부른다. 고객은 너무 비싸다는 생각이 들어도 싸게 해달라고 흥정하지 못한다. 함께 있는 사람들을 서로 의식하여 웬만하면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다. 체면에 편승하여 짭짤한 수익을 올리는 디자이너의 꾀가 돋보인다.

‘과시적 소비’라는 관점에서 보면 명품과 짝퉁의 구매 이유는 전혀 차이가 없다. 가격은 천양지차지만 둘 다 ‘위세재’다. 오른쪽은 경찰에 압수된 짝퉁 명품 시계. 사진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과시적 소비’라는 관점에서 보면 명품과 짝퉁의 구매 이유는 전혀 차이가 없다. 가격은 천양지차지만 둘 다 ‘위세재’다. 오른쪽은 경찰에 압수된 짝퉁 명품 시계. 사진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상여꾼들의 노잣돈과 가문의 체통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돈 ‘몇 푼’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겨진다. 많은 사회에서 재물에 대한 집착은 명예와 함께 가기 어렵다. 돈 욕심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한다. 돈을 언급하거나 직접 취급하는 것만으로도 사회적 위신이 손상될 수 있다. 가령 교사가 수업 시간에 등록금을 아직 납부하지 않은 학생들을 일일이 호명하면서 독촉한다면 교육자로서 권위를 잃어버릴 것이다. 의사가 환자에게서 치료비를 직접 받고 거스름돈을 거슬러준다면 병원의 품격이 떨어질 것이다.

전통문화에서도 무릇 선비에게는 재물을 너무 가까이 하지 않고 이해득실을 시시콜콜 따지지 않는 미덕이 요구됐다. 물질적인 순결함을 지키는 ‘청백리’를 치켜세우면서 관료의 이상적인 모습으로 상정했던 것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장례식 때 운구를 메고 가는 상여꾼들이 ‘노잣돈’을 요구하며 멈춰설 때 서슴지 않고 돈을 꽂아주어야 가문의 체통이 선다. 혼례를 앞두고 함이 들어올 때 함값을 내놓으라고 떼를 쓰는 신랑 친구들에게도 아낌없이 돈을 풀어야 ‘경사’의 분위기가 달아오른다. 너무 타산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는 것이 어느 문화권에서든 귀족의 품위 유지에 핵심이다.

봉투 없이 주는 ‘적나라한’ 돈

사회적 위신은 우선 본인이 지켜야 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타인이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주는 것도 병행돼야 한다. 돈에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돈을 주고받을 때 일정한 예법을 갖추지 않으면 상대방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 수 있다. 그 암묵적인 규칙이 지켜지지 않아 당황스러웠던 경험이 필자에게 있다. 오래전에 어느 단체의 의뢰를 받아 강연을 했는데, 행사가 끝난 뒤 주최 책임자와 함께 도심의 대로를 걸어가게 되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헤어지기 직전 그는 “아참, 강사료를 드려야지요” 하면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나는 그가 당연히 봉투를 꺼낼 줄 알았다. 그런데 그의 손에는 지갑이 들려 있었다. 그것을 열어 수표를 몇 장 꺼내 세어보고 나서,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그대로 건네주는 것이었다. 참으로 난감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아무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오히려 그렇게 알맹이만 꺼내서 주는 것이 간소하고 ‘친환경적’이다. 돈을 꺼낸 다음에 휴지통에 들어가버릴 종이 봉투를 한 장이라도 아끼는 것이 좋지 않은가. 그러나 아무런 포장 없이 ‘적나라한’ 돈을 직접 받을 때 왠지 모멸감 같은 것을 느꼈다. 나만의 감성은 아닐 것이다. 자원 절약을 외치는 환경운동가도 돈을 건넬 때 쓰는 봉투를 없애자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나무가 없어지고 종이가 귀해진다 해도, 축의금이나 부의금을 봉투 없이 현찰로 달랑 건네는 모습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예의나 매너는 본질적으로 ‘불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 불필요함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 돈을 집어넣는 봉투는 편리함을 위한 도구 이상의 의미를 갖는 일종의 상징이다. 그것은 관계와 소통에 ‘격’을 부여하는 매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봉투를 받을 때에도 나름의 격식이 요구된다. 결혼식 축의금 같은 경우에는 더욱 각별한 정성을 담아야 한다. 그런데 예식장 입구에서 축의금을 접수하는 사람들이 최소한의 예의도 지키지 않는 경우가 있다. 봉투를 받자마자 곧바로 열어 액수를 확인하고 장부에 기입하는 것이다. 하객에 대한 크나큰 ‘불손’이리라.

축의금과 식권이 교환되는 결혼식
‘봉투를 받을 때도 격식이 필요해~!’ 결혼을 축하하며 하객들이 내는 축의금은 종종 ‘입장료’처럼 ‘식권’과 맞바꿔진다. 사진 한겨레 자료

‘봉투를 받을 때도 격식이 필요해~!’ 결혼을 축하하며 하객들이 내는 축의금은 종종 ‘입장료’처럼 ‘식권’과 맞바꿔진다. 사진 한겨레 자료

선물은 받은 사람이 그 자리에서 풀어보는 것이 즐거운 의례일 수 있지만, 돈의 경우에는 오히려 큰 결례가 된다. 축의금을 무슨 입장료처럼 ‘납부’하는 것 같고, 축하하는 마음이 무시되는 듯하다. 게다가 축의금을 내는 사람에게만 식권을 ‘지급’하는 시스템도 종종 있는데, 돈을 내고 밥을 사먹는 것 같아 민망하다. 엄청난 비용을 들이는 결혼식이 싸구려 시장판으로 전락되고 마는 까닭은 혼주가 하객을 온 마음으로 맞이하지 않기 때문이다. 조선 양반가에서도 ‘봉제사’(奉祭祀)와 함께 중시했던 것이 ‘접빈객’(接賓客)이 아니었던가. 손님을 깍듯하게 대우하는 것이 지체 높은 가문의 임무였고, 지나가는 행인이나 걸인도 외면해서는 안 되었다.

금전적으로 각박하지 않고 아량을 베푸는 것은 사회적인 신망을 얻는 데 중요한 덕목으로 여겨진다. 특히나 전통사회에서는 돈 하나만으로 위세를 부리기 어려웠다. 산업사회에 접어든 이후에도, 돈이 많다고 아무데서나 뻐길 수 있지는 않았다. 돈이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주눅들지도 않았다. 심지어 대학에서는 부잣집 아이들이 부모의 경제력을 숨기고 일부러 허름한 차림으로 다니는 경우도 많았다. 시대를 고뇌하는 지식인에게 어느 정도의 가난은 명예로운 표식이기도 했다. 도시든 농촌이든 빈곤 속에서도 기개를 잃지 않고 당당하게 삶을 기워가는 얼굴들이 있었다.

‘위세재’로서의 돈이 과도한 집착 불러

그런데 고도성장의 열매를 많은 사람들이 누리고, 본격적인 소비사회로 이행하면서 가치의 척도가 돈으로 획일화돼갔다. 그리고 사람들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자신의 재력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가 이뤄진 직후 많은 한국인들이 세계를 누비고 다녔다. 열심히 일만 하여 수출로 벌어들인 달러가 충분히 비축돼 있었기에, 한국 관광객의 씀씀이는 정말로 대단했다. 특히 낯선 곳에 나가면 괜히 들뜬 기분에 손이 커지고 ‘관대’해진다. 그런데 그 오만함이 도를 넘어 경멸을 자초하는 경우도 많았다. 가난한 나라에서 팁을 뿌려대며 “이 정도면 너희 한 달치 월급이지?”라는 너스레로 으스대기도 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본 러시아인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말이 있다. “한국인들은 돈만 있고, 러시아인들은 돈만 없다.”

돈이 좋은 것은 필요한 재화를 구매할 수 있는 것 말고도, 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과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자라는 사실 자체로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부의 소유는 존경의 기준이 되고 본질적으로 명예로운 것이 된다. (이에 대해서는 일찍이 미국의 사회·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런이 에서 ‘과시적 소비’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분석한 바 있다.) 그러한 사회에서는 돈이 단순한 경제의 차원을 넘어 ‘위세재’(prestige goods)로서의 효용까지 지니기 때문에 돈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만연한다. 돈이 교환의 수단이 아니라 궁극적인 가치요 최종적인 획득 대상이 된다. 거기에서 사람들은 ‘돈만 있는 삶’을 맹렬하게 추구한다.

그러나 어떤 공동체에서는 그런 과시가 통하지 않는다. 인류학자 리처드 리는 남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의 쿵 부시맨족을 현지 조사하면서 난처했던 경험을 들려주고 있다. 현지 조사가 끝나갈 무렵 그는 크리스마스를 기해 그동안 신세를 졌던 사람들에게 감사의 표시로 커다란 황소 한 마리를 선물하기로 했다. 모처럼 포식을 즐기면서 춤을 추고 축제를 즐길 수 있도록 한턱 내고 싶었던 것이다. 여기저기 수소문한 끝에 마음에 드는 소를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부시맨 전부가 배불리 먹고도 남을 만큼 덩치가 크고 살찐 황소였다. 예정대로 그 소를 잡아서 맛있게 먹으며 이틀 밤낮 동안 흥겨운 놀이판을 벌였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이 시큰둥했다. 고맙다는 인사는커녕 어디에서 그렇게 병들고 야윈 소를 잡아왔느냐고 빈정댔다. 농담치고는 좀 심하다 싶어 가장 기분 나쁘게 말했던 한 사람을 찾아가 까닭을 물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교만 때문이지요. …어떤 사람이 너무 많은 짐승을 잡게 되면 그는 자기가 무슨 추장이나 그에 버금가는 대단한 사람이 된 걸로 착각하게 되죠. 다른 사람들을 자기 하인이나 자기보다 못한 사람으로 여기게 돼요. 그렇게 되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어서는 안 돼요. …그의 자만심이 언젠가는 우리 가운데 누군가를 죽일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항상 그가 사냥한 짐승의 고기가 정말 형편없다고 말하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그의 마음에 교만함이 차지 않게 하여 그를 겸손하게 만들어주는 거지요.”(한국문화인류학회, 중에서)

재화의 과시를 통제하는 공동체

이런 관행에 대해 다소 위화감이 느껴질 수 있지만, 재화의 과시를 통제하는 공동체의 문법이라는 차원에서 그 의미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나친 궁핍 속에서는 인간적인 삶과 자존감을 갖기 어렵다. 그리고 사회적인 위세를 갖추려면 어느 정도의 물질적 잉여가 있어야 한다. ‘위세’에는 두 측면이 있다. 하나는 ‘위엄’이고 다른 하나는 ‘허세’다. 그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미묘하게 공존하지만, 명백하게 다른 내용이다. 허세는 자신의 지급 능력을 뽐내면서 타인과의 구별짓기에 몰두하는 것이다. 그에 비해 위엄은 그런 외형적인 차이에 의존하지 않는다. 스스로 품위를 갖추고 안에서 우러나오는 기세가 있어야 한다. 자신의 인격과 역량으로 타인의 모자란 것들을 메워주고 남몰래 베풀어주는 너그러움이 거기에 있다. 그러한 덕망의 문화 유전자가 재생될 때, ‘돈만 있는 삶’이 아니라 ‘돈도 있는 삶’이 가능하다.

김찬호 성공회대 교양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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