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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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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처럼


화폐 시스템이 순조롭게 작동하기 위한 조건이 허물어질 때, 때로 돈은 불쏘시개로 쓰이네
등록 2010-02-25 17:25 수정 2020-05-03 04:26

긴급구호 활동가 한비야씨가 어느 강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자신이 ‘월드비전’이라는 단체에서 일할 때 여러 군데에서 광고 제안이 들어왔는데, 모두 거절하고 ‘세계시민학교’ 설립 기금 1억원 마련을 위한 공익광고 하나만 했단다. 그런데 그 단체를 그만두고 나서 ‘이제 광고를 하나쯤 해도 되겠다’ 싶어 가까운 사람들에게 살짝 이야기했는데, 온갖 제안이 들어오더란다. ‘길을 잘 찾아줍니다’ 하는 내비게이션 광고, ‘이것 하면 대박 난다’는 증권회사 광고, ‘이 신발 신으면 산에 잘 올라갑니다’ 하는 등산화 광고 같은 것들이었다. 신용카드 광고도 있었는데, ‘오지에서 돈이 없는데 이 카드가 통하더라’는 줄거리였단다. 한씨는 그 어느 제안에도 응하지 않았다.

전쟁이나 재해의 조짐이 보이면, 돈의 사용가치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 거의 본능적으로 사재기로 이어진다. 지난 2003년 봄 중국을 휩쓴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 파동 당시 베이징의 한 슈퍼마켓에서 한 여성이 텅 빈 진열대를 돌며 살 만한 물건을 고르고 있다. AP 연합

전쟁이나 재해의 조짐이 보이면, 돈의 사용가치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 거의 본능적으로 사재기로 이어진다. 지난 2003년 봄 중국을 휩쓴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 파동 당시 베이징의 한 슈퍼마켓에서 한 여성이 텅 빈 진열대를 돌며 살 만한 물건을 고르고 있다. AP 연합

혼란의 아이티에서 은행털이가 드문 이유

오지 탐험가로 명성을 얻은 인물을 등장시켜 세계 어디에서나 통하는 카드임을 뽐내게 하는 것은 기발한 아이디어다. 그러나 상징적인 이야기로는 재미있지만, 현실에서 그것은 불가능하다. 카드가 통한다면 이미 오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지에서는 카드는커녕 현찰도 통하지 않기 십상이다. 오지까지 갈 것도 없다. 국경 하나만 넘어가도 한국 돈은 거의 무용지물이다. 돈은 거래 당사자들의 신뢰가 아니라 그것이 통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토대로 가치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달러·유로·엔 같은 ‘기축통화’가 아니라면, 그 발행 국가 바깥에서는 용도가 크게 떨어진다.

그런데 오지가 아닌데도 기축통화조차 아무런 소용이 없을 수 있다. 전쟁이나 천재지변 같은 것이 일어났을 때다. 아이티의 참사 현장에서 상점이나 무너진 주택을 약탈하는 일이 종종 일어났는데, 금고나 은행을 터는 일은 아주 드물었던 것 같다. 재난 상황에서는 돈이 오히려 짐이 될 수도 있다. 1914년 영국의 탐험가 섀클턴이 대원 27명을 이끌고 남극 탐험에 나섰다가 배가 침몰해 무려 18개월 동안 영하 60℃의 추위 속에 고립됐지만 모두 살아 돌아온 일이 있다. 배를 포기하고 최소한의 짐만을 가지고 행군하기로 결정한 대장 섀클턴은 개인당 1kg씩의 짐만 허용했는데, 자신이 가장 먼저 버린 것은 다름 아닌 무거운 돈뭉치였다(그 과정을 담은 책 와 EBS 지식채널 ‘돌아온 28인’ 참조).

2008년 중국의 쓰촨성 지진 때도 화폐는 기능이 중지됐다. 당시에 한국인 유학생 5명이 여행을 하다가 조난을 당했는데, 천신만고 끝에 피해 지역을 벗어나 며칠 밤낮을 걸어 안전한 곳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그들의 호주머니에는 위안화가 꽤 있었는데, 탈출 과정에서 긴요하게 활용됐다. 어떻게? 아직 겨울인 2월에 노숙하면서 장거리 이동을 하는 과정에서 밤마다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그 지폐들을 조금씩 땔감으로 태웠다고 한다. 거기에서 돈의 가치는 불을 붙였을 때 발생하는 열량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돈의 절대적인 쓸모는 딱 그만큼이다. 종이라는 물질로서의 효용이 전부인 것이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그 엄연한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만일 전쟁이나 재해가 일어날 조짐이 보이면 너도나도 황급히 사재기에 돌입한다. 물가가 폭등할 수 있다. 김광균의 시 ‘추일서정’에서 낙엽을 비유한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처럼 돈은 쓰레기처럼 나뒹군다. 돈은 그대로인데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어버리기 때문이다. 사용가치에 대한 인식이 거의 본능적으로 이뤄지는 것이다. 사재기는 그나마 그렇게 교환할 시간이라도 있으니 다행이다. 얼마 전 북한에서처럼 갑작스런 화폐 개혁을 하게 되면, 지니고 있던 돈이 한순간에 휴지 조각으로 전락한다.

몽골 바얀자그의 고비사막 같은 오지에서 돈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없다면, 돈은 그저 종이에 불과하다. 한겨레 탁기형 기자

몽골 바얀자그의 고비사막 같은 오지에서 돈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없다면, 돈은 그저 종이에 불과하다. 한겨레 탁기형 기자

지금까지 나열한 상황들은 아주 드물게 일어난다. 그러나 그 사례들을 통해 화폐 시스템이 순조롭게 작동하기 위한 조건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우선, 교환 수단으로서의 기능을 보증하는 국가 체제가 안정돼 있어야 한다. 또 재해나 조난 등으로 생명의 부지가 위태롭지 않아야 한다는 것도 중요하다. 국가 체제가 흔들리지 않는다 해도 문명으로부터 고립된 지역에서는 화폐 가치가 상대적으로 떨어질 수 있다. 화폐로 교환할 수 있는 재화의 종류가 극도로 제한되기 때문이다.

그런 예외적 상황 속에서 돈의 중요한 본질이 드러난다. 돈은 타인이 그것을 원한다는 전제 위에서만 쓸모가 있다는 점이다. 내가 돈을 원하는 이유는 나 자신이 원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돈을 원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점이 돈과 다른 재화의 결정적 차이다.

다른 사람이 원하기 때문에 돈이 되네

예를 들어, 내가 목이 마를 때 물 한 병은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원하든 원치 않든 내게 소중한 물질이다. 그 자체가 가치를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지갑에 있는 돈은 만일 다른 누구도 그 돈을 원하지 않게 된다면, 그 순간 내게도 아무런 가치가 없는 휴지가 돼버린다(물론 물질도 투기의 목적으로 삼는다면 화폐와 똑같은 성격을 지닌다).

그럼 내 돈을 원하는 다른 사람들은 왜 그 돈을 원하는가? 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자신이 원해서가 아니다. 그 역시 또 다른 누군가가 그 돈을 원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 확신 속에서 돈은 유통되고, 지불의 연쇄가 새로운 지불을 가능하게 한다.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에만 의거해 작동을 지속하는 이러한 시스템을 가리켜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은 ‘자기 준거’라고 칭했다. 전혀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돈만큼은 통한다는 기대가 무한하게 증식하는 가운데 화폐는 제 기능을 하는 것이다.

화폐가 원활하게 유통되기 위한 또 한 가지 조건이 있다. 내 돈을 원하는 상대방이 내게 필요한 재화나 서비스를 제공해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가령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폐인이 돼버려 삶에 대한 의욕을 완전히 상실해 술과 도박으로만 소일한다고 상상해보자. 그렇게 아무도 부가가치를 창출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내가 아무리 많은 돈을 가지고 있어도 무의미하다. 또한 어느 사회에 온통 백만장자들만 있다 해도 돈이 제구실을 하지 못한다. 거기에서도 상대방에게 돈을 주고 내게 필요한 것을 얻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 점을 확인하기 위해 하나의 가상 스토리를 들어보겠다.

태평양에 아름다운 섬이 있는데,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이 매년 그곳에 모여 한두 달 정도 휴가를 보낸다고 하자. 그래서 숙박과 여가에 관련된 시설이 고급으로 갖춰져 있고, 안마에서부터 세탁과 요리에 이르기까지 생활 유지에 필요한 각종 서비스가 완벽하게 제공되는 휴양의 천국이다. 값이 워낙 비싸서 웬만한 부호가 아니고서는 이용하기 어렵다. 어느 여름, 100명 정도의 부자들이 바캉스를 즐기러 도착했는데, 바다의 다른 쪽에서 큰 폭풍이 몰아치는 바람에 그곳에서 일할 종업원들과 필요한 물품을 실은 배가 침몰해버렸다. 부자들은 당분간 되돌아갈 수 없다. 통신 설비를 관리하는 직원이 없어서 외부와의 연락도 두절되었다. 그런 상태로 백만장자 100여 명이 한 달 동안 고립된 섬에서 지내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새해를 맞아 볼리비아 수도 라파스의 전통 시장에서 한 노점상이 ‘가짜 돈’을 팔고 있다. 돈이 필요한 이유는 다른 사람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REUTERS/ MARIANA BAZO

새해를 맞아 볼리비아 수도 라파스의 전통 시장에서 한 노점상이 ‘가짜 돈’을 팔고 있다. 돈이 필요한 이유는 다른 사람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REUTERS/ MARIANA BAZO

부자들만 100명 모인 무인도

다소 황당하기는 하지만, 현실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상황이다. 영화의 소재로 삼아도 재미있는 스토리가 될 듯하다. 일상을 지탱해주는 서비스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채, 야생의 환경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도움 없이 오로지 부자들끼리만 생활을 영위해야 한다. 말 그대로 서바이벌 게임이 벌어지는 셈이다. 원색적인 충돌이 일어날 수도 있지만 수완이 좋은 부자들답게 협상과 거래를 활발하게 벌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돈은 어떻게 사용될까? 가진 것은 돈밖에 없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교환이 일어날 수 있을까?

혹시 누군가가 가지고 온 인스턴트 식품이 있다면 금값이 될 것이다. 요리나 세탁 같은 허드렛일을 누구도 하지 않으려 한다면 그 수고비가 천정부지로 뛸 것이다. 저마다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귀국하면 얼마나 귀하신 몸인데, 여기에서 이 고생을 할 수 있나?’ 그래서 자존심을 내세우면서 돈으로 해결하려 한다. 그러나 상대방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내가 그 정도 돈을 받고서 이런 궂은일을 할 줄 아느냐? 돈이라면 나도 얼마든지 있거든~!’ 모두가 이런 식으로 ‘튕기는’ 동안 상상을 초월하는 인플레이션이 순식간에 일어난다. 나중에 돈을 부쳐주겠다는 약속어음이 액수는 공란으로 남겨둔 채 백지수표처럼 유통된다.

부자들끼리만 사는 세상에서 부자는 더 이상 부자가 아니다. 돈이 전혀 아쉽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돈의 가치는 형편없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돈을 필요로 하는 타인이 존재할 때, 그리고 상대방이 그 돈에 상응한다고 여겨지는 가치의 재화나 서비스를 제공해줄 수 있을 때 돈은 비로소 제구실을 한다. 따라서 돈이 있는 사람들은 돈이 없는 사람들에게 의존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결국 상호 의존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 돈은 효능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단순하고도 자명한 사실을 종종 잊고 산다.

지난해에 개봉된 영화 을 보면, 어느 인터넷 방송 프로듀서가 오스트레일리아의 오지에서 목숨 건 모험을 벌여 최후의 승자 한 명에게 10억원을 상금으로 준다는 조건으로 도전자들을 모집한다. 8명의 남녀가 응모했는데, 게임이 시작되기 전날 밤 한자리에 모여 자기소개를 하면서 10억원이 생기면 뭐할지를 이야기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 가운데 뭔가 큰 실패에 빠져 낙심해 있는 듯한 30대 남자가 한숨을 푹 쉬며 이렇게 말한다. “10억이 생기면,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서 혼자 살고 싶어요.” 오죽 세상이 지긋지긋하면 저렇게 말할까. 그 심경이 이해되면서도, 냉정하게 따지면 말이 안 된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는 돈도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 사람이 완전한 무인도를 말한 것은 아니겠지만, 돈만 있으면 어디에서든 마음 편하게 살 수 있으리라는 통념이 거기에 깔려 있다.

맹목적인 추구가 돈의 가치를 위협해

인류의 삶터는 점점 위태로운 곳으로 변해가는 듯하다. 자연재해는 빈발하고 전쟁과 갈등이 끊이지 않는다. 거대한 시스템이 자꾸만 고장을 일으키며 불안이 가중된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단절되고 저마다의 삶이 무인도처럼 고립돼간다. 그리고 타인에 대한 불신이 돈에 대한 맹신을 낳는다. 그런데 돈에 대한 맹목적 추구가 돈의 가치를 위협하고 있다. 돈이 돈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전제 조건에 균열이 생기는 것이다. 삶과 사회의 기반을 망각하고 무한 축적으로 치닫는 경제는 파국을 피할 수 없다.

김찬호 성공회대 교양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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