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년 전 서울 상명대에서 있었던 일이다. 미술대학의 한 교수가 철제 조각품 5점을 만들어 경기 김포의 작업실로 옮기려고 운동장에 내놓았는데, 학교 근처에서 일하는 인부들이 그것을 가져다가 고물상에 팔아넘겨 경찰에 구속됐다. 그들은 경찰에서 “학교 쪽이 귀찮아 처리하지 않은 줄 알았다. 한갓 고철 덩어리가 예술품이라니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다행히 5점 가운데 3점은 되찾았으나, 2점은 이미 절단해버린 상태였다. 학교 쪽은 그 피해액이 3천만~4천만원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인부들이 고물상에서 받은 돈은 2만1500원이었다. 똑같은 물건의 가치가 사람에 따라서 1천 배 이상 차이나는 것, 동물의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인간 사회에서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은 사회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고귀한 작품도 고물상 눈에는 고철일 뿐
오지 탐험을 즐기는 어느 한국 여성의 경험담이다. 인도네시아의 외딴섬 깊숙한 산골마을에서 며칠 묵을 기회가 있었단다. 그런데 그 마을에서는 결혼을 할 때 신랑이 신부 쪽에 값을 치러야 했다. 이른바 ‘신부대금’(bride wealth)이다. 이 여성 방문객은 문득 호기심이 발동했다. 과연 자신과 같은 조건의 여자를 신부로 맞이하려면 어느 정도 대가를 내야 하는지가 궁금해 현지 주민에게 물어봤다. 외모도 준수한 편이고 대학원도 졸업했기에 꽤 높은 값이 매겨질 것이라 예상했다. 그런데 실망스러운 답이 되돌아왔다. 돼지 네 마리 정도면 된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나이가 서른을 넘어 아이를 많이 낳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문명화된 사회에서도 생물학적 차원에서 사람의 값어치를 계산하고 거래하는 것이 전혀 없거나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만일 당신이 급하게 돈이 필요해 모든 것을 처분하고도 모자라면 자신의 육신까지 팔아야 할지 모른다. 실제로 예전에 가난한 이들이 수돗물을 마셔가면서 피를 팔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 나의 몸은 과연 얼마를 받을 수 있을까? 가장 쉽게 셈한다면 혈액이나 장기 매매 가격을 참고할 수 있겠다. 혈장을 한 번 뽑아주면 얼마를 벌 수 있다거나, 암시장에서 신장 하나가 얼마에 거래된다는 등의 정보를 모아 따져보는 것이다. 아예 목숨까지 포기하고 몸의 모든 부위를 팔아넘긴다면 건강한 사람의 경우 몇억원까지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신체를 훼손하지 않고 몸을 그대로 팔 수도 있다. 역사 속에서 오랫동안 노예시장이라는 것이 엄연하게 존재했고, 거기에서는 신체적 건장함을 절대적 척도로 몸값을 매겼다. 그런데 더 이상 노예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에서도 가끔 인신매매가 이뤄진다. 얼마 전 대구에서 어느 젊은 남녀가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갓 낳은 아기를 200만원에 판 일이 있었다. 그 가격이 어떤 기준에서 매겨진 것인지 궁금하지만, 아기를 돈을 주고 사고판 것 자체가 사람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그런데 아이를 판매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해외 입양도 마찬가지라고 보는 시각이 있다. 지금도 한국은 ‘고아 수출국’이라는 오명을 쓰면서 많은 아이들을 외국으로 내보내고 있다. 미국 가정이 한국 아이를 입양하는 데 치러야 하는 비용은 1만7215달러로, ‘입양 시장’에서 한국 아이가 가장 비싸다. 똑똑하다고 소문이 나서 인기가 좋다고 한다.( 760호 ‘똑똑한 한국 아이 2169만원이오’)
‘정신적 부가가치’로 수백억원 버는 스타들이렇듯 사람의 가치를 생물학적 차원에서 여러 가지로 따져볼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그 이상의 차원에서 가늠할 때가 훨씬 많다. 다른 동물들의 경우 가치가 먹이나 서식지, 짝짓기 상대로 분명하게 한정되는 반면, 사람이 갖는 욕구나 필요는 엄청나게 폭넓다. 드넓게 펼쳐지는 상상계에서 촘촘하게 의미의 그물을 짜내 공유하고, 거기에서 경험되는 희로애락의 부피가 실로 방대하다. 그래서 정신적 부가가치를 생산하면서 큰돈을 벌어들이는 이들이 많다. 예술, 스포츠, 연예 등의 분야에서 창조성을 발휘하거나 탁월한 기량을 뽐내는 사람들이다.
그 세계에서 최고의 경지에 오른 사람들이 받는 ‘몸값’은 보통 사람들이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이다. 올해 영국의 맨체스터유나이티드에서 스페인의 레알마드리드로 이적한 축구선수 호날두가 이번 시즌에 받는 연봉은 950만파운드(약 156억원)로, 매일 4천만원 이상 버는 셈이다. 연봉 외에 광고 수입 등도 엄청날 것이다. 하지만 그런 호날두도 매년 1천억원 이상을 버는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 앞에서는 감히 돈 자랑을 하지 못한다. 천문학적 계약금이나 연봉을 받는 선수들은 도대체 어떤 가치를 생산하는 것일까? 밥을 먹여주는 것도 아픈 곳을 고쳐주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거액을 버는 이유는 무엇일까? 세계의 수많은 스포츠팬들에게 즐거움과 감동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렇지, 공 잘 다루는 재주 하나 가지고 그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현실은 아무리 생각해도 불공평하다. 현란한 드리블이나 정교한 스윙에 경탄을 금치 못하다가도 그들과 나의 수입을 비교하면 힘이 쪽 빠진다. 나의 몸값이 너무 초라하다. 그것을 애써 잊거나 무시하려 하는데, 다른 뉴스들이 나의 ‘무능력’을 상기시켜준다.
[%%IMAGE2%%]예를 들어 유명 인사들의 보험금 같은 것이다. 교통사고로 하반신을 쓸 수 없게 된 가수 강원래씨는 그로 인한 손실액을 계산해 21억원을 받았고, 어느 중소기업 사장의 사망 보험금은 35억원이었다. 그리고 지난해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로 작고한 삼성전자 임원의 경우 유가족이 보험금으로 50억원을 청구했다고 한다. 과연 내가 죽으면 나의 가족은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 보험회사에서 사용하는 공식에서는 평균 연수입을 따지고 그 분야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기간 등을 산출한다. 보험회사는 수입을 되도록 적게 계산하려 하고, 수령자 쪽에서는 최대한으로 잡고 싶어한다. 한 인간의 생애를 그가 종사했던 직업 활동의 수입으로 환산하며 옥신각신한다.
인간의 노동이 산출하는 가치를 경제적으로 계산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필자가 외부 강연 의뢰를 받을 때 가끔 곤란한 질문이 들어온다. 강사료를 얼마 드리면 되겠느냐고 물어오는 것이다. 속으로 생각하는 금액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그냥 그쪽에서 책정하는 기준으로 달라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강의처럼 무형의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일수록 값을 따지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절대적인 액수보다 상대적인 차이에 민감해진다. 가끔 과분한 강의료를 받고서 뿌듯해하다가도, 세계적인 스타 강사들이 받는 강의료에 비교하면 ‘껌값’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면서 부질없는 자격지심에 사로잡힌다.
비교는 끝이 없다. 자선기금을 모으기 위해 워런 버핏과 점심 식사 할 수 있는 티켓을 경매에 부쳤는데, 무려 168만달러(약 20억원)에 팔렸다고 한다. 나도 그 흉내를 내서 학생들과 함께한 송년 파티 자리에서, 나와 함께 외식을 하고 영화까지 보여주는 티켓을 경매에 내놔봤다. 그 돈은 어디엔가 기부하고 일체의 데이트 비용은 내가 내는 조건이었다. 결과는? ‘원가’에도 못 미치는 1만원에 낙찰됐다.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나와 점심 식사 하는 즐거움에 비해 워런 버핏과 함께하는 즐거움이 20만 배 이상이 되는 것인가?
본질적 가치, 돈으로 측정할 수 있을까그런 질문을 파고들다 보면 근본적인 물음에 봉착한다. 과연 가치를 가격으로 매긴다는 것이 가능한가? 나의 존재나 활동의 산물 등을 화폐 단위로 측정해 본질을 포착할 수 있을까? 어느 기업인이 시인을 만난 자리에서 대뜸 던진 첫마디가 “요즘 시가 팔리나요?”였다고 한다. 매상이 만물의 척도가 되어 무엇이든 잘 팔리면 그 정당성이나 가치가 인정되는 세상에서 우리는 오히려 진정한 가치를 인식하지 못하는 듯하다.
돈이란 매우 정확한 듯하지만, 그것처럼 오락가락하는 것도 없다. 수십억원 연봉을 받는 미국 금융회사 최고경영자(CEO)들이 회사를 말아먹어 주주는 물론 사회 그리고 지구촌 전체에까지 폐를 끼치는 경우를 우리는 지난해 여러 차례 목격했다. 반면 돈 한 푼 벌지 못하는 무능력자라 할지라도, 만일 외국에서 인질로 잡혀 정치적으로 민감해진다면 정부는 그를 구출하기 위해 몇십억원까지 치러야 할 수도 있다. 그 상황에서 그의 몸값은 인질범들이 부르는 대로다.
문화의 영역으로 갈수록 가격의 자의적인 성격이 짙어진다. 이 글 첫머리에 미술작품을 둘러싼 해프닝을 소개했지만, 미적 가치는 사람에 따라 그리고 시대에 따라 전혀 다르게 평가되는 경우가 많다. 반 고흐가 남긴 글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다. “내가 어떤 방식으로든 다른 사람에게 유용한 존재가 될 수 있을까? 나는 어떻게 세상에 쓰일 수 있을까? 내가 어떤 목적에 도움이 되거나 이로운 존재가 될 수 있을까? 내가 너나 다른 사람들에게 주체스럽고 무거운 짐으로 여겨진다면, 그리고 네가 나를 불청객이나 게으름뱅이로 보게 된다면, 그럴 바에는 차라리 나라는 존재가 없어지는 것이 낫겠다는 느낌이 든다. …내 그림이 팔리지 않는 것은 나도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언젠가 내 그림이 물감값 이상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될 날이 올 것이다.”
고흐뿐이랴. 천재적인 예술가들 가운데 당대에는 철저하게 외면당했던 이가 많다. 거의 굶어죽다시피 했던 이중섭 화백이 자신의 그림이 얼마에 거래되는지를 저 세상에서 알게 되었다면 억울해서 잠이 오지 않을 듯하다. 모차르트나 슈베르트는 가난과 고독 속에서 생을 마쳤지만, 만일 그들의 저작권료를 제대로 따져서 챙겨준다면 엄청난 액수가 될 것이다. 반면 당대에는 반짝이는 갈채를 받으면서 부귀와 영화를 누렸지만 역사에는 한 줄도 오르지 못한 예술가들이 적지 않다.
예술만이 아니리라. 우리가 귀하게 생각하는 것일수록 값을 매기기가 어렵다. 인간의 존재 가치를 객관화해 숫자로 정확한 값을 매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연봉이 2배 차이가 난다고 해서 능력의 차이가 갑절인 것은 아니다. 자연의 만물들에 가격표를 붙이는 것도 허망하기 그지없다. 예를 들어 코끼리는 10억원 정도 줘야 구입할 수 있지만, 비둘기나 참새는 돈 한 푼 없이도 그냥 잡아먹거나 기를 수 있다. 그러나 코끼리가 참새보다 가치 있다고 볼 수 있는 생태학적 근거는 전혀 없다. 동물만이 아니다. 어떤 대상이 시장에서 거래되는 가격이 그 본질적 가치를 반영하지 못한다.
가격은 알아도 가치는 모른다는 게 답‘뜬금없다’고 할 때, 뜬금의 사전적 의미는 ‘일정하지 않고 시세에 따라 달라지는 값’인데, 생각해보면 모든 가격은 뜬금이다. 그래서 일찍이 쇼펜하우어는 말했다. ‘나는 모든 것의 가격을 안다. 그러나 어느 것의 가치도 모른다.’
김찬호 성공회대 교양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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