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교 랍비와 가톨릭 신부와 개신교 목사가 논쟁을 벌이게 됐다. 신도들이 교회에 낸 헌금 가운데 얼마만큼이 신의 몫이고, 얼마만큼이 성직자의 몫인가 하는 문제였다. 첫 번째로 랍비가 의견을 제시했다. 땅바닥에 둥그렇게 원을 그려놓고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돈을 던진다. 원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야훼의 돈, 바깥으로 나가는 것은 성직자의 돈이다. 가톨릭 신부는 정반대였다. 원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성직자의 돈,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 하느님의 돈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개신교 목사가 의견을 내놓았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다. 그러니 돈을 하늘로 던져서 위로 올라가는 것은 하나님의 몫이고, 땅으로 떨어지는 것은 성직자의 몫이다.
대형 교회의 사유화와 불교의 재산 갈등종교와 돈은 어떤 관계인가? 초월적인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구도의 생활에서 현세의 물질은 허망한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절대자의 섭리와 경륜 앞에서 상대적인 세계의 경제적 이해득실은 하찮은 문제로 작아진다. 영원한 천국을 약속받은 사람에게 물질적 손익은 덧없는 계산일 뿐이다. 더 나아가, 돈에 대한 욕심 자체가 진리의 구현에 걸림돌이 된다. 그래서 거룩한 뜻을 따르는 신자들에게 금욕과 청빈이 요구되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오직 하느님의 나라와 그 의(義)를 구하라, 자신의 소유를 아낌없이 나눠주면서 하늘에 보화를 쌓으라는 예수의 말씀은 그리스도교 경제관의 핵심을 이룬다.
하지만 현실에서 교회는 그러한 가르침을 쉽게 배반한다. 중세 교회의 면죄부 판매는 종교의 타락상을 극명하게 드러냈지만, 신의 형상이 금전으로 얼룩지고 뒤틀리는 일은 지금도 계속 벌어진다. 헌금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벌받을 것이라는 협박, 모인 헌금을 교세 확장과 성직자의 사리를 채우는 데 쓰는 모습, 교회 안에서도 부자들이 대접받는 분위기…. 근래에는 일부 대형 교회에서 교회가 교직자의 사유물처럼 여겨지고 교묘한 수법으로 아들에게 세습돼 지탄을 받고 그로 인해 신도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는데, 그 핵심에는 돈이라는 우상이 우뚝 서 있다. 순수한 영혼으로 성스러운 세계를 추구하는 공동체에서 속물근성과 탐욕이 독버섯처럼 번식하고, 이에 환멸을 느끼고 상처받아 교회를 떠나는 이가 적지 않다. 물론 기독교만이 아니다. 무소유와 해탈을 위해 정진하는 불교에서 재산을 둘러싼 갈등은 종종 폭력으로까지 비화한다.
그런데 돈을 좇는 종교에는 현세적 이윤을 추구하는 신자들의 신앙 동기가 깔려 있다. 이른바 기복 신앙은 많은 종교의 태생적 속성 가운데 하나다. 자신과 가족의 안락을 확보하기 위해 아무리 몸부림쳐도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에서 신령한 힘에 기대 소원을 이루고자 하는 갈망은 강렬하다. 인간의 영역 너머에 있는 운명을 신이 통제하도록 주문해, 불운을 물리치고 행운을 불러들이는 것이다. 질병이나 가난에서 벗어나는 수준을 넘어, 부귀영화를 얻고자 하는 욕심이 종교적 열망으로 표출될 때도 많다.
어느 교회당에서 늦은 밤에 한 신자가 간절히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주식에 투자했는데 대박을 터뜨려 큰돈을 벌 수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리는 중이었다. 그런데 바로 뒤에서 어느 노숙인이 끼니를 걱정하면서 1만원만 손에 쥐게 해달라고 애절하게 기도하고 있었다. 앞에서 기도하던 신자는 그의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신경이 쓰였는지 갑자기 뒤로 돌아 그에게 1만원을 건네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봐요, 하나님이 헷갈리시겠어요. 이 돈 드릴 테니까 이제 그만 돌아가시지요.”
“각자 가진 것을 모두 모으자”개인만이 아니라 조직의 차원에서도 주술적 기복이 이뤄진다. 기독교적 가치를 경영 이념으로 내세우는 어느 기업은 매장에 휴게실을 없애가면서까지 기도실을 만들어 직원들이 일정한 시간에 기도하도록 했다. 그곳에는 다음과 같은 기도의 제목이 붙어 있다고 한다. ‘우리 회사를 더 성장하게 해주소서’ ‘세후 이익 6% 달성‘ ‘매출 10억 달성’ ‘총매출 1억 달성’….
물질적 축복의 희구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실현되는 방식이 문제다. 무엇이 중요한가? 신약성경 마가복음 6장에 나오는 오병이어(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기적은 그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군중이 예수에게 몰려들어 말씀을 듣다 보니 날이 어둑해졌다. 제자들이 예수에게 다가와 “이곳은 들판이고 때도 저물어가니 무리를 보내 마을에 가서 무엇을 사먹게 하십시오”라고 했다. 이에 예수는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대답한다. 이에 제자들은 “그러면 우리가 가서 200데나리온의 떡을 사다가 그들을 먹일까요?”라고 되묻는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지금 먹을 것이 얼마나 있는지 물었고, 제자들이 수소문하니 한 어린아이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꺼내놓았다. 예수는 5천 명의 군중을 50에서 100명 단위의 소그룹들로 나눠 앉게 한 뒤 그 음식에 축사한 다음 모두에게 나눠주도록 했다. 모두 만족스럽게 먹고 남은 분량이 열두 바구니였다.
먹을 것이 없는 상황에서 제자들이 내놓은 해결책은 각자 허기를 채우고 돌아오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수단은 화폐였다. 그것이 가장 간편하지만 예수가 보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돈이 있는 사람은 배불리 먹고 오겠지만, 돈이 없는 이는 굶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로 하여금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도록 지시한다. 그런데 제자들은 여전히 돈으로 해결하는 발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자기들이 그 많은 떡을 사다 먹여야 하느냐고 반문한다. 아마도 약간의 반항기와 짜증이 섞인 어조였으리라. 그런데 예수는 바깥에서 답을 구하지 않았다. ‘우리’ 안에 이미 있는 것을 찾아보자고 제안했다. 각자 가진 것을 꺼내 모으고 나누면 얼마든지 먹을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예수가 베푼 기적은 마술이 아니다. 만일 그가 초능력을 발휘해 순식간에 음식을 대량 복제해냈다면 인간은 항상 그런 구원자에게 기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기적이 마음의 변화에서 비롯된다면 언제나 스스로 일으킬 수 있다. 예수 일행이 먹기에도 모자랄 만큼 적은 음식이지만 그것을 모두의 것으로 내놓고 나누기 시작하자, 군중도 가지고 있던 음식을 내놓았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군중을 소그룹으로 나눠서 앉도록 했다는 점이다. 5천 명이 한 무리로 있을 때와 달리 작은 단위로 분해되면서 그 안에 얼굴과 얼굴이 마주치면서 서로 알아볼 수 있는 공동체가 생겨난 것이다.
극도의 굶주림에 시달리는 아우슈비츠에서도 빵조각을 건네는 손길이 있었다. 어떤 수감자가 자기보다 더 배가 고플 것이라 여겨 옆사람에게 준 빵조각이 그 갸륵함을 싣고 여러 동료를 돌고 돌아 결국 자신의 손에 다시 오자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내가 내놓으면 저 사람도 내놓을 것이라는 계산에서가 아니라, 순수하게 나누는 미덕이 기적을 낳는다. 결핍된 상황에서 오히려 풍요를 경험한다. 결핍과 풍요의 역설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 창조된다. 그러나 뿔뿔이 단절된 개인의 단순한 집합 속에서는 경쟁과 눈치가 판을 치면서 아무리 물질이 풍족해도 한없이 부족하다고 느끼게 된다. 우리는 지금 어떤 현실을 만들고 있는가? 그 밑에 깔려 있는 세계관은 무엇인가?
지구촌의 기아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하는 기금 조달 전문가 린 트위스트는 (The Soul of Money)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단 세상을 무언가가 결핍된 곳으로 정의하고 나면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부족함을 채우는 데만 집중한다. 자기 자신을 책임진다는 것은 고귀한 일이다. 하지만 사람이 자기 자신을 책임질 수 있을 만큼 자원이 넉넉하지 않은 상황이라면, 남의 희생을 요구해서라도 살아남을 수밖에 없다. 안타까운 일이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심지어는 정당한 것으로 인정받기도 한다. 이것은 어린이들이 즐겨하는 의자 뺏기 놀이와 비슷하다. 사람 수에 비해 의자 수가 하나 모자라는 상황이다. …결핍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우리는 소중하다고 혹은 한정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자원을 독점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필요한 제도와 시스템을 만들어낸다.”
인간은 뛰어난 두뇌의 힘으로 아직 오지 않은 사태를 미리 떠올려볼 수 있다. 그 상상력은 즐거운 삶에 대한 희망을 빚어내기도 하지만, 끔찍한 고통에 대한 불안을 자아내기도 한다. 아무리 재산이 많은 사람도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채 발가벗은 미물로 전락할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의 보편적 실존이다. 그런데 생존의 언덕이 가파르게 기울어질수록 탈락과 가난에 대한 공포가 만연한다. 경쟁에서 도태되고 그나마 가지고 있던 것마저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염려 때문에 악착같이 돈을 모으고 불려나간다. 그러한 집착이 상승작용을 일으켜 빈익빈 부익부의 구조를 만들고 그것은 다시 삶에 대한 두려움으로 악순환된다.
저마다 원자화된 채 고립돼 경쟁만 할 때 결핍감의 압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마음에 초점을 맞출 때 풍요로움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세상에 충분하게 주어져 있다. 유한한 것을 차지하려 다투는 대신 무한한 것으로 모으고 넓혀갈 때 우주의 신비를 만난다. 물질 그 자체는 한정된 것이지만, 그것이 지니는 가치는 얼마든지 부풀릴 수 있다. 하루하루의 삶을 은총으로 받아들일 때 그 선물을 나누면서 존재를 누릴 수 있다. 이것은 특정 종교를 넘어서 누구나 체험하고 깨달을 수 있는 진실이다.
물질 가치는 얼마든지 부풀릴 수 있다구세군의 자선냄비에 조용히 온정을 내려놓는 손길들로 거리가 따스해지는 계절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절망과 탄식이 깊어질수록 오병이어의 기적에 대한 소망이 간절해진다. 물신을 절대화하면서 한없이 숭배하는 세상, 사랑의 권능으로 의로운 세상을 이룩하고자 했던 예수의 임재는 어떤 축복으로 재현될 수 있는가.
‘세상 어둠 아무리 깊다 해도/ 마침내 별이 되어 오신 예수여/ 하늘과 땅을 잇는 존재 자체로/ 사랑의 시가 되신 아기여/ 살아 있는 우리 모두/ 더 이상 죄를 짓지 말고/ 맑은 마음으로/ 처음으로 속삭이게 하소서/ 겸손하게 내려앉기를/ 서로 먼저/ 사랑하는 일에만 깨어 있기를/ 침묵으로 외치는 작은 예수여.’(이혜인 ‘성탄 기도’ 중에서)
김찬호 성공회대 교양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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