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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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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가게의 정감 잃어버린 아이들


동네 아저씨와 인격적 관계 대신 맥도널드의 물신적 관계 배우면서 가치관 형성
등록 2009-10-16 11:13 수정 2020-05-03 04:25

어린아이들이 돈의 쓰임새를 깨닫는 것은 인지 발달에서 중요한 비약이다. 발달심리학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아이들의 경제관념은 5살 전후에 시작되어 사춘기에 이르기까지 꾸준하게 학습된다. 시장 놀이를 하면서 거래와 돈의 기본 원리를 터득하고, 11살 무렵 이윤의 개념을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전통사회에서 아이들이 어른들의 생산활동이나 집안일을 거들면서 노동의 주체로서 공동체에 참여했던 반면, 지금은 거의 모든 아이들이 소비의 주체로서 경제를 경험한다. 아이들은 일찍부터 ‘돈맛’을 알아간다.

표준화된 접객. ‘맥도널드화’를 통해 청소년은 어른과 똑같은 대접을 받으며 돈의 힘을 더욱 실감할 수 있게 됐다. 사진 한겨레 자료

표준화된 접객. ‘맥도널드화’를 통해 청소년은 어른과 똑같은 대접을 받으며 돈의 힘을 더욱 실감할 수 있게 됐다. 사진 한겨레 자료

노동의 주체에서 소비의 주체로

한국 부모들은 자녀의 시간 낭비에는 엄격한 데 비해 돈 낭비에는 관대한 편이다. 공부하느라 힘들어하는 아이가 돈 좀 쓰는 것은 크게 문제 삼지 않는 것이다. 놀이의 시공간이 극도로 제한된 청소년들에게 소비는 잠시나마 자유로운 공기를 쐴 수 있는 여가다. 학교나 가정에서 거의 주어지지 않는 ‘선택’의 묘미를 경험할 수 있고, 형형색색의 상품과 이미지로 자아와 일상을 다채롭게 꾸며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매개로 또래 집단의 소통이 원활해지고 유대가 돈독해진다. 돈은 참으로 고마운 존재다.

1년 중 아이들의 용돈이 가장 풍성해지는 것은 세뱃돈을 받는 설날이다. 세뱃돈은 꽤 오래된 풍습이지만, 예전에는 워낙 가난했고 아이들의 수가 많았기 때문에 그 액수가 미미했다. 그런데 이제는 아이들의 수가 줄어들어서, 웬만한 집에서는 친척들이 모이면 아이들보다 어른들이 더 많다. 아이 한 명당 갖게 되는 세뱃돈의 액수가 올라갈 수밖에 없다. 해마다 설날에 지출되는 세뱃돈의 규모가 무려 2조원 안팎이라고 한다. 그 가운데 아이가 너무 어려서 엄마의 지갑으로 곧바로 들어가는 것을 절반 정도 잡아 제하더라도 무려 1조원의 돈이 아이들에게 현찰로 쥐어지는 것이다.

동네에 구멍가게가 사라지고 24시간 편의점이 들어서면서 청소년들은 돈의 힘을 더욱 실감할 수 있게 되었다. 구멍가게에서 물건을 살 때는 상인과 고객의 관계 이전에, 동네 아저씨 혹은 아줌마와 동네 아이의 관계다. 아이의 가족이나 생활을 잘 알고 있는 경우도 많다. 그에 비해 편의점의 점원은 동네 사람들과 인격적 관계를 맺지 않는다. 단골이라는 것이 아예 없다. 그래서 모든 고객을 똑같은 방식으로 대한다. 정해진 인사말로 깍듯하게 대하는데, 청소년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어른과 마찬가지로 정중하게 맞이하고 서비스해준다. 커피전문점이나 햄버거 가게에서도 마찬가지다. 표준화된 접객은 ‘맥도널드화’(McDonaldization)의 중요한 일부를 이룬다.

인간의 역사에서 이것은 예외적인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이들이 집 바깥에서 어른들과 사회적 관계를 맺지 못하고, 그 대신 경제적 관계만을 아주 단편적이고 순간적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사회적 관계가 배제된 경제적 관계에서는 돈이 절대적이다. 상점 주인은 고객이 구매력이 있을 경우에 한해서만 존중해준다. 돈을 가지고 있으면 집에서 부모로부터 좀처럼 받기 어려운 환대를 받을 수 있다. 특히 백화점 같은 곳에서는 손님을 극진하게 모신다. 심지어 지난해에는 어느 교복가게 주인이 자기 가게 상품을 구매하도록 유혹하는 과정에서 고등학생들에게 술을 접대한 일까지 있었다.

아버지에게 원하는 건 재력뿐

돈의 위력을 믿을수록 인격적 관계에 대한 신뢰는 줄어든다. 요즘 청소년들이 돈을 얼마나 신봉하는지 알려주는 통계들이 있다. 한국투명성기구가 지난해 ‘청소년 반부패인식지수’(Youth Integrity Index)를 가지고 조사한 바에 따르면, ‘10년 감옥 사는 한이 있어도 10억 원을 번다면 부패를 저지를 수 있다’고 응답한 중고생이 17.7%였다. 어느 설문조사에 따르면, 대학생의 44%가 ‘아버지에게 원하는 것은 재력뿐’이라고 대답했다. 또한 어느 초등학교에서 장래의 희망을 적어보라고 했더니 ‘부자’라고 답을 한 아이들이 절반이었다고 한다. 연예인이나 교사나 과학자 등의 직업을 기대했는데, 그런 구체적인 장래상(像)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아이들은 사회의 거울이다. 돈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은 결국 어른들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이다. 아이를 키우면서도 그 강박이 무의식적으로 작용한다. 집단적으로 만연돼 있어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한국인의 일상 문화를 연구하는 강의에서 한 수강생이 다음과 같은 관찰을 보고서에 적어낸 적이 있다.

“얼마 전 나는 돌잔치를 갈 일이 있었다. 요즘은 돌잔치를 집에서 하지 않고 돌잔치 전문 식당에서 이벤트 형식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는데 역시 그 집도 돌잔치 전문 업체에 의뢰해 돌잔치를 성대하게 치렀다. 식당에 도착해 돌잔치의 주인공인 아기와 인사하고 앉으니 요란한 소리가 들리며 돌잔치의 하이라이트인 돌잡이가 시작되었다. 돌잡이에는 청진기, 돈, 수채화 붓, 연필 등 다양한 것이 있었다. 그중에서 아기는 수채화 붓을 잡고 싶어했다. 그러자 아기의 부모는 화들짝 놀라더니 얼른 돈을 아이에게 흔들고, 결국 아이는 돈을 잡았다. 그러자 부모는 만족한다는 표정을 지었고 사람들도 ‘돈이 최고지’라며 다들 박수를 쳤다.”

아이가 수채화 붓을 집으면 화가가 될 것이니, 가난한 예술가가 되어 라면으로 끼니를 때울지도 모르는 운명을 부모는 방치할 수 없었던 것이다. 돌잡이가 평생을 좌우한다고 굳게 믿는 속신(俗信)도 흥미롭거니와, 인생의 엄청난 가능성을 오로지 돈이라는 잣대 하나로 판단해 축소시키는 사고방식은 무섭기까지 하다. 억지로라도 돈을 쥐게 할 만큼 아이를 부자로 키우고 싶은 열망은 간절하다. 돈에 대한 맹신은 일종의 가풍이 되고 사회적인 기풍(에토스)이 되어 아이들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형성한다.

이제 걸음마를 배우기 시작한 아이가 자기 앞에 놓인 물건들 가운데 돈을 외면하고 붓에 시선이 가는 것은 자연스럽다. 네모반듯한 종이에 복잡한 그림과 문양들이 새겨진 지폐는 아이의 눈에 흥미로운 대상이 아니리라. 그에 비해 길고 가느스름한 나무 대롱의 끝 부분에 부드러운 털 뭉치가 달린 붓은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만져보고 요모조모 살피면서 탐구하고 싶은 물건이다. 하지만 어른들의 눈에 붓은 흔해빠진 잡동사니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돈은 무엇과도 교환할 수 있는 마법의 도구다. 붓은 구체적 질감을 지닌 사물이지만, 돈은 추상적 기능을 지닌 미디어다.

발도로프 교육의 창시자 루돌프 슈타이너는 아이들이 너무 일찍 구체적인 삶에서 배제되어 추상적·관념적 세계에 갇혀 지낼수록 돈에 더욱 집착하게 된다고 한다. 요즘 아이들이 살아가는 일상이 꼭 그렇지 않은가. 놀이를 통해 신체의 역학과 율동을 익히지 못하고, 물건이나 공간과 사귀면서 그 안에 기억을 담아두지 못한다. 백화점의 디스플레이와 광고 카탈로그의 이미지들로 감수성이 채워진다.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과 어우러지면서 관계의 역동을 실감하기 어렵다. 그래서 어떤 어려움에 부딪히거나 필요한 것이 있을 때 돈 없이 해결하는 상상력이 부족하다.

물질적 풍요가 창의성 갉아먹어

아이들에게 절실한 것은 자신의 ‘능력’을 발굴하고 키워가는 경험이다. 어떤 문제에 부딪히면 우선 스스로 처방을 생각해내는 지혜, 부족한 것이 있으면 다른 사람의 도움을 구할 줄 아는 사회적 지능이다.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무조건 구입할 생각부터 하는 것이 아니라 손수 만들어보든가 주변 사람들에게 빌리거나 얻는 방법부터 고민해볼 줄 알아야 한다. 쓰던 물건이 고장났을 때도 그냥 버리고 새것을 사기 전에 제 손으로 고쳐보겠다고 도전할 줄 알아야 한다.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는 습성으로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지 못한다. 어느 정도의 결핍이 창의성을 유발한다.

물질적으로 풍요를 구가하면서도 자꾸만 무기력해지는 까닭은 자기 안에서 솟아오르는 에너지로 삶을 꾸려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각적인 만족에 익숙하게 하는 소비사회에서는 무엇을 꾸준하게 연마하고 축적하는 품성이 자라나기 어렵다. 구매력은 순식간에 획득할 수 있지만, 지적 능력이나 노동의 기술은 시간이 걸린다. 그 지루한 과정을 견디면서 성장을 꾀하고 소질을 개발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바로 교육의 핵심이다. 외적인 강제나 이해관계가 아니라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의욕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일이든 공부든 스스로 동기를 부여할 수 있어야 진정으로 능력 있는 사람이다. 그 동기는 삶 자체가 주는 기쁨에서 생성된다. 자기와 타자가 유의미하게 연결돼 있을 때 잠재력을 힘차게 두드릴 수 있다. 자신의 소양과 세계의 가능성을 즐겁게 탐색할 수 있을 때, 주변의 뭇 현상과 사물들에 마음의 촉수를 들이대면서 의식과 감성을 가다듬어갈 수 있을 때, 아이들은 행복하고 유능한 인간으로 자라난다. 경제적 풍요는 그러한 삶의 생태계를 훼손할 수도 있고, 안전한 성장이 깃드는 사회문화적 공간의 토대가 될 수도 있다. 돈과 삶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묻고 있다.

김찬호 성공회대 교양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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