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이, 옵니까?” 버스를 기다리다가 정류장 승강대에 크게 붙어 있는 광고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사진에는 어떤 남자가 침대에서 잠을 자는 모습이 담겨 있다. 수면제나 침구류 광고일 거라고 짐작했다. 그런데 추측이 빗나갔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조금 작은 글씨로 이런 문구가 쓰여 있었다. “늙지도, 아프지도 않을 자신이 있으신가 봅니다. 아니면, 노후 의료비를 2배로 준비해놓으셨군요.” 보험회사 광고였다. 수명이 점점 길어지고 퇴직은 점점 빨라지는 세상에서 당신의 노후는 위태로운데 도대체 무엇을 믿고 그렇게 평안하냐는 경고였다. 자녀 교육이나 노후 준비에 관한 상품에서 곧잘 등장하는 공포 마케팅의 전형이다.
많은 쌀은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데, 많은 돈은…
공포의 근거는 분명해 보인다. 재무설계 전문가들에 따르면, 60살 무렵 은퇴할 때 확보해두어야 할 노후자금이 적게는 6억원에서 많게는 30억원까지 이른다. 가능할까? 40~50대에 자녀의 대학교육과 결혼, 부모의 병원비 등으로 돈이 바닥나거나 마이너스가 되는 현실에서 그러한 거금을 마련할 수 있는 사람은 지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그러한 기준 내지 목표는 수많은 중년들에게 당연하게 여겨진다. 그래서 엄청난 압박과 불안에 시달리면서, 돈을 끌어모으는 데 전력투구한다. 노후 준비는 곧 자금 비축으로 등식화된다.
노후 준비만이 아니다. 돈은 모든 문제를 풀어주는 마법의 지팡이로 여겨진다. “세상에 안 되는 일이 어디 있어.” 영화 에서 어느 부동산업자가 정치인에게 비자금을 건네준 뒤 했던 이 말은 굳건한 믿음으로 자리 잡아간다. 그런데 현실에서 그 신앙은 종종 배반된다. 돈이라는 마스터키를 손에 쥐었다면 많은 일이 수월하게 해결돼야 하는데, 부자들이 수많은 문제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그 문제 가운데 상당 부분은 오히려 돈이 많아졌기 때문에 생겨났거나 심각해진 것이다. 돈이 해결의 열쇠가 아니라 새로운 문제의 원천이 되어버린 셈이다.
돈에는 그 자체로 일정한 가치가 담겨 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돈은 일반 재화와 뚜렷이 구별되는 속성이 있다. 예를 들어 쌀은 공급량이 늘어날수록 희소성이 줄어들고, 사람들은 그만큼 식량 문제에서 자유로워진다. 실제로 과학기술 덕분에 우리는 보릿고개를 넘기게 되었다. 식량이 증산되면서 끼니 해결이 어려운 절대 빈곤층은 확실히 줄어들었다. 이렇듯 일반 재화는 공급이 늘면 수요가 충족된다. 그런데 돈은 다르다. 엄청난 신용이 창출되는데 돈이 없다고 더 아우성이다. 통화량이 크게 늘어났지만 희소가치는 전혀 줄어들지 않는다. 너도나도 하루 종일 돈 타령이다. 부가 편중되어서만이 아니다. 고소득층 가운데도 돈에 얽매이고 시달리는 이가 많다.
쌀과 돈의 차이는 무엇인가? 내가 소유하는 쌀은 그 자체로 절대적 가치를 지닌다. 다른 사람이 쌀을 얼마만큼 가지고 있든, 내가 먹는 쌀이 나의 허기를 채워줄 수 있는 효용에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돈은 다르다. 나의 돈은 다른 돈들과 직결돼 있다. 그 가치가 광범위한 상호 관련 속에서 결정되는 것이다(물론 쌀도 화폐처럼 통용되거나 투기나 사재기의 대상이 될 경우에는 마찬가지다). 돈은 사람과 사람을 잇는 미디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언어의 일종이다. 언어가 그러하듯이 돈도 인간 사이의 관련 속에서만 효용이 있다. 무인도에서 쌀은 요긴하지만 돈은 아무 소용이 없다.
인간에게 언어가 중요한 까닭은 사회를 떠나서는 생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사람은 개인적으로 너무 나약해서 타인과 협동하며 살아야 한다. 인류는 생물학적 취약점을 사회적 차원에서 해결해왔고, 그 핵심에 소통이 자리 잡고 있다. 언어가 발생하고 각종 미디어가 발달하면서 인간 사이의 연계가 점점 넓어졌다. 그런데 문명사에서 또 하나의 획기적인 미디어가 화폐다. 돈으로 인해 교류와 통합의 범위가 비약적으로 확대되었다. 언어와 달리 화폐는 직접 대면해 소통하지 않고서도 교환과 분업을 가능하게 해준다. 언어와 마찬가지로 화폐도 종류에 따라 저마다의 통용권이 제한돼 있지만, ‘통역’이나 ‘번역’에 비해 ‘환전’은 신속하고 간편하게 이뤄진다. 언어적 소통이 물리적인 시간의 제약을 받는 데 비해, 화폐는 글로벌한 규모에서 순식간에 막대한 양이 거래될 수 있다.
그런데 사회를 묶어주던 돈이 언제부터인가 사람 사이를 오히려 격리시키고 있다. 언어와 달리 돈은 소유와 독점의 대상이 될 수 있어서 그런 것이리라. 돈이 최고의 목적으로 여겨지면서 치열한 경쟁이 벌어진다. 이러한 풍조를 가리켜 흔히 ‘물질만능주의’ 또는 ‘물신숭배’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이는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돈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물질이 아니라 돈을 원한다. 만일 사람들이 정말로 물질을 숭배한다면 물건을 가진 사람이 돈을 가진 사람보다 우위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시장에서는 거의 항상 판매자가 구매자의 비위를 맞추어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돈을 최고로 여긴다.
돈의 힘이 커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돈을 통해서만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돈을 매개로 해서만 사회와 관련을 맺을 수 있다는 뜻이다. 모두가 돈만을 신봉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무엇 때문에 돈이 필요한가? 모두가 돈벌이에 몰입하지만, 정작 돈의 용도는 모호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불안하기도 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선 돈을 확보해두면 안심이 될 것 같다. 그래서 돈에 더 집착한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돈을 향해 질주하기 때문에 돈 벌기가 갈수록 어려워진다. 불안이 증폭되고 그럴수록 더욱 돈에 매달린다.
노후 준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자. 왜 그토록 많은 돈이 필요한가? 우선 자신이 노후에 아무런 경제활동을 할 수 없고 오로지 소비만 한다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지레 스스로를 예비 무능력자로 규정해버리는 것이다. 반면 지출의 예상 목록과 부피는 자꾸만 늘어난다. 어떤 삶을 영위하고 싶은지에 대한 그림이 분명치 않기 때문이다. 자기도 모르게 불어난 씀씀이 규모를 노후에 그대로 연장해 적용하면서 막대한 돈을 한꺼번에 마련해두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린다.
생활의 구조가 점점 고비용으로 치닫는 까닭이 또 하나 있다. 삶이 점점 개별화되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단절될수록 모든 것을 상품이나 서비스로 해결해야 한다. 예전에는 이웃이나 친지들끼리 상부상조하고 나눔으로써 자연스럽게 충족되고 해결되던 일들이 이제는 돈이 없으면 안 되는 것이다. 게다가 돈이 중요하게 여겨질수록 돈벌이에 매달리느라 관계가 단절된다. 호혜의 영역이 축소되면서 시장은 확장된다. 개인의 원자화와 돈의 절대화가 꼬리를 물면서 순환되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무능한가
지금 한국의 경제가 몹시 위태롭다. 일자리는 줄어들고 빚만 늘어간다. 부실과 방만 속에 키워온 거품의 대가를 피할 길이 없어 보인다. 이 혹독한 과정을 치르면서 무엇을 학습해야 하는가? 경제는 어떤 방향으로 리모델링되어야 하는가? 그 핵심은 ‘사회’의 복원이다. 인간의 삶은 사회 속에서만 존립할 수 있다. 돈도 마찬가지다. 돈이 없는 사회는 있을 수 있어도, 사회 없는(관계가 완전히 해체되었다는 의미) 돈은 무용지물이다. 돈은 언어와 마찬가지로 사람들 사이의 약속이고 신용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연 무능한가? 어쩌면 돈이 우리를 왜소하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노동시장에서의 위치가 사람을 평가하는 절대 기준이 되면서 무능력자가 양산된다. 그러나 이 세상에 쓸모없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그 능력은 사회 속에서 키워지고 발휘된다. 실업이 무서운 것은 경제적 빈곤과 함께 사회적으로 고립돼버리기 때문이다. 노동시장과 상품시장이 공공의 영역이나 공동체를 대체하고, 그 바깥에서 의미 있는 타자를 만나고 사회를 형성할 수 있는 기회가 차단된다.
돈으로 매개되지 않고 사람과 사람이 맺어질 수 있는 고리들을 다양하게 재생 내지 생성하는 일이 시급하다. 특히 청년들에게 공적인 자아를 경험하면서 성장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되어야 한다. 시장을 통하지 않고서도 사회와 접속할 수 있는 회로가 다양하게 열려야 한다. 비시장적 영역들이 든든하게 버텨줄 때 시장도 건실해질 수 있다. 지역 화폐에서 생활협동조합에 이르기까지 국내외에서 다채롭게 시도되는 사회적 경제는 사회 속에 시장을 새롭게 위치시키려는 실험들이다. 거기에서는 국가 관료 시스템의 ‘규격’이나 거대한 시장경제의 ‘가격’과는 달리 개개인의 ‘인격’에 기반한 협동으로 지속 가능한 우애의 경제를 지향한다.
경제의 본질은 무엇인가? ‘돈’이 아니라 ‘가치’다. 복잡한 눈치작전과 통제 불가능한 변수들이 얽히는 시스템 속에 끊임없이 요동치는 머니게임의 소모전에서 빠져나와, 삶을 풍요롭게 빚어내고 키워가는 살림살이에 정성을 기울이자. 불가해한 시장에 운명을 맡기는 대신, 알아볼 수 있는 규모와 얼개로 삶을 재구성해야 한다. 가치는 자명한 것이 아니라, 내가 또는 우리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원하는가에 대한 대답에 따라 여러 가지 모습으로 구성된다. 당신이 진정으로 바라는 ‘좋은 삶’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어떤 자원이 필요한지 질문하고 탐색해나가자. 그 과정에서 서로를 고마운 벗이나 이웃으로 발견하고, 자신의 존재 가치와 잠재력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스스로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자라난다.
부의 원천은 여전히 자연 그리고 사람부의 원천은 무엇인가? 하나는 자연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이다. 자연을 가치의 근원으로 보지 않고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시킬 때 파멸과 고갈을 피할 수 없다. 사람을 노동의 도구 또는 마케팅의 대상으로만 취급할 때 사회는 난폭하고 경박해진다. 결국에 경제도 쇠퇴하기 마련이다. 부의 원천이 경색되기 때문이다. 마음의 힘과 창조성 그리고 사람 사이의 협동에서 가치가 생성된다. 그 가치를 인식할 때 우리는 돈과 새롭게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돈은 사회적 유대를 북돋는 방향에서 새롭게 자리매김될 수 있다. 이제 화폐는 불특정 다수의 욕망을 끝없이 증폭시키는 장치가 아니라, 나의 필요와 타인의 능력을 이어주는 가교가 된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돈의 주인 노릇을 할 수 있다. 철학자 베이컨은 말했다. “돈은 최상의 종(하인)이고, 최악의 주인이다.”
김찬호 성공회대 교양학부 초빙교수
*‘김찬호의 돈의 인문학’ 연재를 마칩니다. 그간 수고하신 필자와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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