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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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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하게 끌려갈지 모르는 그들을 위해

등록 2009-07-15 13:19 수정 2020-05-03 04:25

대마초를 키우려면 따뜻한 기온이 필요하다. 집 안에서 몰래 키우려면 난방을 화끈하게 해야 한다. 이때 열이 많이 나는 특수 조명기구를 사용한단다. 수사기관은 K의 집이 비정상적으로 전력 소모가 많은 것을 의심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집 앞 도로 건너편에서 열감지기를 사용해 탐색해본다. 과연 K의 집 창고 쪽 지붕과 한쪽 벽의 온도가 다른 곳보다 매우 높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이를 바탕으로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아 수색에 나선 수사기관은 대마초를 발견하고 K를 체포한다. 여기에 ‘형사절차상 정의’와 관련된 문제는 없을까? 열감지기를 이용한 탐지는 ‘압수수색’에 해당할까? 그렇다면 ‘영장 없는’ 압수수색에 해당할 텐데, 불법이 아닐까?
미 연방대법원은 ‘킬로 대 연방정부 사건’(2001년)에서 이렇게 답했다.
“우리는 인간의 감각을 확장시키는 신기술을 이용해 한 가정 내부에 관한 어떤 정보를 얻는 일, 즉 그런 기술이 없었다면 물리적으로 그 집 안에 침입해야만 얻을 수 있는 정보를 얻어내는 일은 압수수색에 해당한다고 본다. 그 기술이 일반인들도 보통 사용할 정도로 보편화한 게 아닌 한, 그 기술로 헌법상 보호되는 영역(집 안)을 들여다봐서는 안 된다.”
열탐지기로 볼 수 있는 건 아주 희미한 영상일 뿐, 집 안의 세부적인 모습을 볼 수는 없지 않을까? 어쨌든 관찰자는 집 밖에 있었는데, 불법일 리 없지 않을까? 아니, 프라이버시 침해는 아닐까? 열감지기에는 사람의 형체도 나타날 텐데, 혹시 남녀가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면 어떨까? 아니, 엑스레이 촬영도 아닌데, 무슨 형체가 나타난다고 그러시나? 엑스레이로 찍었다면 전자기파가 벽을 ‘뚫고’ 들어갔으니 ‘침범’이라고 쳐도, 열탐지기는 저절로 나오는 열선을 감지했을 뿐이 아닌가? 온갖 논리가 동원돼 치열한 법리 공방을 겪었다.
그러나 미 연방대법원은 “사적 영역인 집 안에서는 그 어떤 모습이든 정부가 엿봐선 안될 만큼 사적인 것”이라며 “사람은 자기 집에서 안락함을 누릴 고유의 헌법적 권리, 의심받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없다면 공권력의 침해를 받지 않을 권리를 갖고 있다”고 결론 내렸다.
열탐지기든 뭐든 영장을 발부받아 사용하란 얘기다. 범죄를 의심할 만한 충분한 사유가 있는지, 과도한 프라이버시 침해는 아닌지 등을 수사기관 대신 법관이 충분히 따져 결정하란 얘기다(최근 잇따른 몇 달치 전자우편 압수수색 사례들을 볼 때 우리나라 법원에서도 그렇게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장 보수적인 대법관 중 한 명인 스캘리아조차도 “집 안 구조에 1인치라도 침범했다면, 문을 열고 현관에 깔린 카펫만 봤더라도, 한 줌의 복사열만 탐지했더라도 그건 압수수색이다”라고 말했다.
이 케이스는 압수수색과 체포, 조사 과정을 다루는 700쪽짜리 미국 형사소송법 교과서 중 단 두 쪽 반을 차지한다. 미국 로스쿨에선 한 학기 내내 이 과목을 배우는데, 어디까지가 허용되는 수사 방식이며 그것을 벗어났을 때는 수사기관에 어떤 불이익을 줘야 하는지를 다루는 논의의 방대함과 시시콜콜함이란 과도한 지적 유희 같다는 느낌을 넘어 편집증 환자의 일기를 보는 듯한 현기증을 일으킨다.
하지만 그 뿌리는 한 지점이다. 시민의 자유에 대한 존중이다. 형사절차의 정의는 범죄자가 아니라 선량한 시민을 위한 것이다(물론 범죄자도 공민권을 가진 시민임이 틀림없지만). 선량한 시민이 국가의 힘에 의해 부당한 괴롭힘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헌법과 형사소송법이 존재한다. 미국 로스쿨 학생들이 형사절차의 까다로운 원칙들을 익히기 위해 수백 개의 관련 판례를 공부하고, 온갖 편집증적 질문을 만들어도 보고 대답도 해보는 이유다(예를 들어 차량에 타고 있는 용의자를 긴급체포할 경우 무기 사용이나 증거 인멸을 막기 위해 그가 즉시 손을 쓸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주변을 영장 없이 압수수색할 수 있다. 그렇다면 차 트렁크는 그 수색 범위에 해당할까? 용의자가 교통법규를 위반하기를 기다려 긴급체포한 뒤 애초 수사 목적인 마약 단속을 위해 몸을 뒤진다면, 이는 적법한 압수수색일까?…).
지금이야말로 선량한 시민에 대한 형사절차가 문제되는 시대다. 억울하게 끌려가는, 끌려갈지 모르는 그들을 위해 ‘수사받는 법’ 매뉴얼을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다. 그러나 종국적으로 우리를 지켜주는 건 법이 아니라는 점도 덧붙이고 싶다. 미국의 판사이자 법철학자인 러니드 핸드(1872~1961)의 말이다.
“우리의 희망을 지나치게 헌법과 법률, 법정에 기대는 건 잘못된 희망이다. 자유는 뭇사람들의 심장에 자리한다. 그곳에서 자유가 죽으면, 헌법도 법도 법정도 도와줄 일이 그리 많지 않다. 심장에 자유가 살아 있다면, 그를 위해 어떤 헌법도 법도 법정도 필요가 없다.”

박용현 편집장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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