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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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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라, 인권OTL] 법과 현실, 그 냉소적 거리

에이즈 감염인에게 강의하며 느낀 거리감,
그리고 근본 변화를 담지 못한 법 개정
등록 2008-11-07 16:27 수정 2020-05-03 04:25

눌변의 변호사인 나는 말하는 것보다는 듣는 게, 듣는 것보다는 읽는 게 훨씬 편하다. 말을 직업으로 삼는 변호사로서는 ‘10점 만점에 0점’이다. 그래도 가끔 교육이나 강의를 해야 할 경우가 생기는데, 어느 활동가의 표현에 따르면 나는 ‘활동가용’이지 ‘일반인용’은 아니라고 한다. 아는 사이에 접어주고 들어가면, 그럭저럭 들어줄 수 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에이즈 감염인의 인권에 대해 대상자를 달리해 두 번 교육할 기회가 있었다. 감염인 인권 문제는 이전에 에이즈예방법 개정 활동에 참여하면서 고민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단단한 편견의 껍질을 깨는 소중한 기회였다고 평가하고 있었다. 에이즈 문제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과 같은 공포와 편견이 내게도 있었고, 인권과 현실의 거리가 너무나 먼 만큼 그 공백을 법과 제도의 언어로 전환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 과정을 활동가들과 함께하면서 하나하나의 쟁점들에 대해 제법 치열하게 고민했고, 함께 결론을 만들어나갔다.

대전제, 인권 보장이 바로 예방

강의는 이러한 예방법 개정과 관련한 쟁점들을 소개하는 내용이었고, 첫 번째는 대구의 에이즈상담센터 상담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다. 강의는 매우 순조로웠다. 부당한 현실과 법 규정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던 상담원들과는 손쉽게 말과 말 사이의 길이 트였다. 각자의 문제의식과 경험이 서로에게 피드백되어, 나에게도 배움이 많은 좋은 시간이었다. ‘활동가용’으로는 나의 눌변이 그럭저럭 ‘통’했던 모양이다.
두 번째 강의는 서울에 있는 같은 상담센터에서 감염인 당사자들을 활동가로 양성하는 과정의 하나로 기획된 것이었다. 대구에서의 강의 평가가 좋았다며 동일한 내용의 강의를 부탁했다. 별다른 고민 없이 강의를 시작했으나 반응은 이전과 전혀 달랐다.
처음부터 강의는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감염인 당사자들은 자신들의 삶과 구체적 경험이 법과 제도의 언어로 마찰 없이 규정되는 것에 정서적으로 반발하는 것으로 보였다. 법 개정의 문제의식과 삶의 구체적 경험을 소통시킬 접점을 찾지 못했다. 그들에게서 법과 제도에 대한, 그리고 나의 말에 대한 ‘냉소적 거리’가 느껴졌지만, 나의 눌변은 그 간극을 메울 힘이 없었다. 강의를 마치고 나오는 낯선 길의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리고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고, 에이즈예방법이 개정됐다. 우리의 문제제기가 상당 부분 반영된 절충안의 형태였고, 이전보다는 분명히 개선된 내용이었다. 그러나 ‘인권 보장이 바로 예방’이라는 근본적인 관점의 변화를 담아내지 못한 법은 생기가 전혀 없었다. 당시 감염인들에게서 느껴졌던 ‘냉소적 거리’를, 이번에는 내가 법에 대해 느껴야 했다. 이 정도의 개선으로 당사자들의 삶에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변화가 있을까? 부당한 현실은 단 1m라도 움직였을까?
인권은 ‘문제를 드러내고 말하는 과정’ 속에 있다고 한다. 서툰 말솜씨로 더듬거리며 나아가는 것이 인권을 말하는 시작이라면, 눌변인 내가 그 ‘냉소적 거리’를 극복하는 것도 그 과정의 하나일 것이다. 그때 그 감염인들은 교육과정을 마치고 상담활동가의 역할을 하고 있을까? 그들은 개정된 예방법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다시 더듬거리며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까?

정정훈 공익변호사그룹 공감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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