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기빈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
누구나 ‘시장경제’를 이야기하지만 그것에 깔려 있는 가장 중요한 전제는 간과되는 경우가 많다.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현대 시장 자본주의 경제는 ‘객관적 사실’이 아닌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에 기초해 있다. 경제 현상은 물리학이나 화학적 현상과 같이 인간의 의지나 가치 평가와 무관한 것이기는커녕, 그러한 인간- 물론 개인이 아닌 집단이다- 의 주관적 가치 평가에 의해 자산가치와 감가상각 같은 가장 기초적인 회계 범주들과 그 수치부터 결정돼 있는 희한한 현상이다.
위기의 최대 근원, 정부
경제 현상은 어디까지나 인간 세상의 문제이며, 인간 세상은 미래의 불확실성과 정보의 불충분성이라는 조건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따라서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 아닌 지상의 인간으로서는 이 문제들을 모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단 하나뿐이니, 그것은 시장에 우르르 모인 무수한 인간들이 자기들 스스로 알고 있는 바에 근거를 두고 최대한 합리적인 예측을 함으로써 각자가 가진 유한한 자원- 돈이든 무어든- 을 ‘베팅’하도록 하는 것이다. 특히 그 모든 가지가지의 시장 흐름을 총괄하는 금융시장은 그래서 마치 백설공주 계모의 거울처럼 이 세상 곳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가장 정확하고 빠르게 종합해 보여주는 최고의 인간 제도라는 것이다. 이것이 ‘시장경제’의 기초 원리다.
지난주에 한국의 외환시장이 한 차례 격동을 치렀다. 그러자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은 ‘쇠고기 파동과 같은 잘못된 정보의 확산’ 때문이라고 윽박질렀다. 금융감독원은 위기설과 같은 ‘악성 루머’를 퍼뜨리는 자들은 형사처벌도 불사하겠다면서 특별 단속반까지 만들 것이라고 했다. 물론 할 말이 있을 것이다. 우선 그 항간에 떠도는 ‘9월 위기설’이라는 것이 6조원 남짓의 단기 외채 만기가 9월에 돌아온다는 것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현재 한국 경제의 규모로 보았을 때 고작 그 정도 액수로 ‘제2의 환란이 온다’는 소란이 벌어지는 ‘난센스’에 관료들로서는 억울하고 화도 났을 것이다. 또 불난 집에 기름 붓듯이 유수 외국 언론에서 한국 위기론을 운운하며 드는 논거들 중에는 사실과 다르거나 최소한 의심스런 것들도 분명히 있었다. 그러니 이 ‘아고라에나 모여들어 허황된 유언비어나 수군대는 자들의 작란(作亂)’을 때려잡는 것이 대책이라고 생각됐을 수 있다.
실로 어이없는 일이지만, 이렇게 시장을 ‘촛불집회’처럼 때려잡으려 드는 정부의 모습이 위기의 최대 근원으로 보인다. 앞에서 말했듯, 오늘날 시장은 일개 경제 주체- 비록 그것이 일국 정부라 할지라도- 가 옳다 그르다를 판단할 대상이 아니다. 시장에 일정한 흐름이 현실적으로 존재한다고 했을 때, ‘펀더멘털’이 어떻다는 둥 하면서 그것을 가르치거나 백안시하려 드는 것이야말로 최악의 행동이다. 그놈의 ‘펀더멘털’ 타령이 얼마나 끔찍한 대가를 치르게 했는지 우리는 1997년 가을 뼈아프게 겪은 바 있다. ‘펀더멘털’ 자체가 미래의 수익 창출과 자금 흐름에 대한 ‘시장’의 예측에 근거한 ‘상호주관성’이 아니란 말인가. 그 상호주관성을 낳는 시장 스스로가 견해를 바꾸는 순간이 금융시장이 예측 못한 변동을 보여주는 순간이 아닌가.
왜 그 많은 돈을 풀었는가
시장에 모여든 모든 개인들은 알토란 같은 돈을 굴리기에, 각자 최대한의 정보와 숙고를 거쳐 나름대로 행동하는 이들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진정 영향을 미치려 한다면 항간의 우려를 세심히 분석해 그것을 불식시킬 수 있는 유리한 정보를 모두 내놓고 합리적으로 설득하면서 또 일관된 행동으로서 그것을 선도해야만 한다. 하지만 정부는 이와 정반대의 행동을 보여주었다. 첫째, 현재 정부 스스로가 지난 6월 한 달에만 10조∼20조원의 자금을 풀어 외환시장에 개입한 것으로 추정된다. 정말 원화 하락의 압력이 강만수 장관의 말대로 ‘거짓된 정보에서 비롯된 신기루’라면 어째서 그 엄청난 돈을 풀었던 것이며 그 돈은 지금 다 어디로 갔는가. 둘째, 금감원이 ‘형사처벌을 불사하려는’ 경제위기론을 처음으로 설파한 이는 바로 이명박 대통령이 아닌가. ‘경제가 전반적으로 어렵다는 말이지 외환위기가 날 정도라는 뜻은 아니었다’고 할 것인가.
‘시장’도 촛불집회 때려잡듯이 하려는 일련의 행태에서 ‘선진화’를 외치는 현 정부가 기실 얼마나 현대 시장경제에 적응하지 못한 낡은 세력인지 적나라하게 보인다. 촛불집회는 공권력과 언론 통제로 일시나마 잠재울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시장’은 그런 어설픈 시도에 결코 고삐를 잡히지 않으며 되려 그 몇 배의 대가를 치르게 하는 보복을 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 경제의 여러 여건이 좋아 보이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정부의 대응 및 관리 능력의 부재’야말로 불안정한 세계 경제의 격랑에 빠져든 한국 경제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불안 요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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