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용현 한겨레21 편집장 piao@hani.co.kr
아프리카에서 인권 변호사로 일하는 친구한테서 전자우편이 왔다. 그냥 근황을 전하는 편지였을 뿐인데, 마지막에 꼬리말로 붙여놓은 글귀 때문에 한동안 전자우편 창을 닫지 못했다. 로널드 드워킨이 눈카마스를 소개하며 했다는 그 말.
실로 오랜만에 눈카마스(Nunca Mas)란 단어를 떠올린다. ‘절대로 다시는’(Never Again). 1970~80년대 남미의 독재정권들이 무수한 고문과 납치와 학살을 자행하며 국민을 상대로 ‘더러운 전쟁’을 벌였고, 이후 그 실상을 조사한 아르헨티나 ‘실종자위원회’가 84년 제출한 5만여 페이지짜리 보고서의 제목이 그것이었다. 절대로 다시는 반복하지 말자.
더러운 전쟁의 참혹함은 되새기기도 겁난다. 특공대는 영장 없이 체제전복범으로 의심되는 사람을 체포하고… 아이들은 부모가 보는 앞에서 고문을 당하였고, 부모는 아이가 보는 앞에서 고문을 당하였다. …희생자의 시신을 운동장에 파묻었다. 더 이상 매립지가 부족하자 다음에는 희생자의 시신을 동력톱으로….( 오름 펴냄, 2002)
그런 끔찍한 일들은 남미뿐 아니라 아프리카에도 있었고 아시아에도 있었고 대한민국에도 있었다. 그리고 모두들 그 끔찍한 일들이 ‘있었다’의 과거형일 뿐이길 바랐다. 눈카마스.
그러나 이 초록색 별에는 권력을 탐하여 ‘더러운 전쟁’에 대한 유혹을 느끼는 인간들이 끔찍한 유전자를 이어가고 있으며, 적당한 기후와 토양만 갖춰지면 남미든 아프리카든 아시아든 가리지 않고 언제든 징그러운 실뿌리를 뻗는다.
아프리카의 친구는 그래서 늘 분주하고 고단하다. 그래서 지금도 그 글귀를 전자우편 꼬리말로 달아놓고 사는 거다.
인간 사냥을 하듯 시위대 검거 포상금을 지급하겠다고 하고, 방송사에 사복경찰이 들어가 아수라장을 만들고, 검찰·감사원은 정권의 입맛에 따라 움직이고, 국무총리는 국회를 무시하고, 지지율 10%대의 대통령은 국민을 무시하고…. 바야흐로 지금 이곳에서도 더러운 전쟁의 유전자가 세포분열을 시작하는 듯하다. 피를 흘려야만 학살인가. 거리에서 벌어지는 국민의 인격에 대한 고문,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국민의 정신에 대한 납치, 권력의 독한 태도에 상처받는 국민의 영혼에 대한 학살이 소리 없이 진행되고 있다. 5년 뒤 재집권을 생각한다면 도저히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행동을 대통령이나 집권당이나 태연히 반복하고 있다.
이 초록색 별에는 ‘더러운 전쟁’에서도 끝내 살아남아 “눈카마스”를 외치는 사람들도 굳센 유전자를 이어왔다. 이 별이 푸른 이유는 그들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을 키우는 건 역설적이게도 저 끔찍한 유전자가 파헤쳐놓은 토양이다. 드워킨은 이 말을 한 거다.
“어느 곳에서든 독재에 대항하는 가장 확실한 보증수표는… 독재가 왜 혐오스런 것인지에 대해 대중의 인식이 높아지는 것이다.”
국민은 그들을 잘살게 해주겠다던 정치세력이 집권하자마자 어떻게 사나운 맹수로 변하는지, 잊었던 오랜 기억을 되찾고 있다. 독재는 왜 혐오스런 것인지, 우리는 잊고 있었던 거다. 굳센 유전자들이여, 눈카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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