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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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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가는 5년

등록 2008-08-08 00:00 수정 2020-05-03 04:25

▣ 홍기빈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

이명박 정권은 ‘잃어버린 10년’이라는 수사를 즐겨 쓴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좌파 정권’ 10년을 그렇게 부른다. 그리고 자신들은 그 세월을 만회할 ‘선진화’ 세력이라고 한다. 천만의 말씀이다. 지금 보기에는 앞으로 한국 보수 세력의 집권 기간은 ‘거꾸로 가는 5년간’이 될 조짐이다. 몇 개월 지나지도 않은 시점에서 이렇게 과감한 예견을 하는 이유가 있다. 2008년, 눈이 팽팽 돌도록 변해가는 세계 속에서 기로에 처한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이들의 나침반이 1970년대 박정희가 휘두르던 ‘이념 대립’과 ‘경제성장’이라는, 케케묵은 냉전 시대의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단 두 개의 칼

냉전은 끝났다. 1848년께 유럽을 떠돌던 ‘공산주의의 유령’은 이제 완전히 무저갱 속으로 들어갔으며, 지구상 그 어디에도 진지한 정치 세력으로서 ‘체제 전복’ 따위를 꾀하는 집단도, 또 그러한 집단이 있을 것으로 상정하고 정치사회 담론을 펴나가는 세력도 없다. 지난 십 몇 년간의 ‘지구화’가 종식을 고하면서 급변하는 세계 경제의 상황에 적응하려는 몸부림과 변신의 소리만이 들릴 뿐이며, 이른바 ‘3차 산업혁명’의 물결에 적응하기 위해 어떻게 사회경제 체제를 다시 디자인할 것인가라는 첨예한 논의와 논쟁이 이루어질 뿐이며, 이러한 변동과 불안정의 세계 속에서 어떻게 집단적 및 개인적 차원에서의 안전과 안보를 확보할 것인지를 놓고 매일 열리는 각종 회의와 테이블이 있을 뿐이다. 인터넷을 켜보라. 도서관의 정기 간행물실에서 세계 각국에서 나오는 주요 저널과 잡지를 한나절만 훑어보라. 이 21세기에 새롭게 나타난 도전들이 얼마나 근원적이고 심각한 것이며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고지를 선취하기 위한 경쟁이 얼마나 심하게 이루어지는지도 금방 느낄 수 있다.

가뜩이나 변화무쌍한 ‘다이내믹 코리아’, 보수 정권 출범 이후 그 다이내믹이 ‘스테이지 II’로 들어섰다. 미국 쇠고기에, 독도와 금강산 피살 사건에, 촛불에, 방송 및 인터넷의 주도권 다툼에, 주가 폭락과 부동산값 폭락에, 급격한 물가 인상에, 또 이러한 굵직한 사건들에서 파생되는 숱한 잔가지 쟁점들이 어지럽게 교차하는 가운데 우리는 이제 또 극적인 변동의 롤러코스터로 대한민국이 휩쓸려 들어가고 있음을 매일 느끼고 있다.

그런데 이 ‘선진화’ 세력이 근원적이고도 복잡하기 짝이 없는 21세기 도전들을 해결하는 방법은 단 두 개의 칼을 휘두르는 것이다. 하나는 ‘비즈니스 코리아’요, 다른 하나는 ‘좌우 대립’으로서, 실타래처럼 칭칭 감기고 꼬여 있는 대한민국의 온갖 문제들을 이 쌍칼을 휘둘러 쾌도난마로 해치우고 있는 것이다. 먼저 대한민국 국내 정치에 좌파네 우파네 하는 이념 대립을 확실히 부활시켜 국민을 반으로 갈라놓았다. 촛불 시민들은 ‘좌파에 휩쓸린 폭도’가 되었고, 공영 방송과 인터넷은 ‘좌파 불순 세력’이 장악한 곳이라고 한다. 그동안 남북 협력의 모든 성과가 담겨 있다 할 6·15와 10·4 선언은 원천 무효가 천명되고 있으며, 6자회담이 끝나 급변하는 동북아 정세에 대응하는 외교 정책이란 알량한 ‘한-미 동맹’ 하나다. 경제도 마찬가지다. 세계 경제와 한국 경제는 70년대 이후 30년 만에 다시 살아난 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바이러스에 노출됐고, 자산 디플레와 한국 경제의 내적 붕괴(implosion)에 대한 두려운 전망이 매일같이 나오는 상황이다. 여기에서 한국의 경제사회 구조를 21세기형 사회로 재구조화하고 안정화할 계획은 간 데가 없고 그저 뭉칫돈이 오가는 큰판이나 벌려 경제성장률 숫자나 올리겠다는 헛바람 든 허망한 계획만 어지럽게 난무하고 있다.

문제는 이념이 아니라 실력

외교도, 통일도, 경제도, 정치도 이런 낡아빠진 쌍칼잡이가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2008년 8월 현 시점에서 그동안 불거져나온 문제들은 이 쌍칼에 단번에 끊기기는커녕 수천 갈래로 더 복잡하게 꼬이면서 온 나라를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도록 옥죄고 있다. 대한민국은 지금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지정학적으로 심각한 도전에 처해 있다. 그런데 집권 보수 세력의 사고 방식과 행태는 70년대에서 조금도 변한 것이 없어 보인다. 나는 이들의 ‘이념’- 그런 것이 있다면- 에는 관심도 없고 이 급박한 2008년에 그런 이야기를 꺼낼 생각도 없다. 지금 우리가 문제 삼고 짚어보아야 할 것은 이들의 ‘실력’이다. 이들은 ‘선진화’ 세력인가, 아니면 나라를 칭칭 감고 있는 ‘70년대에서 살아온 물귀신’인가.

오는 8월15일, 이들은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꾸자고 외치며 떠들썩한 건국 60주년 행사를 할 모양이다. 전경련이 나서서 대기업 임직원 자녀들까지 동원한다고 한다. 아예 여의도 한가운데를 밀어치우고 ‘5·16 광장’에서 하시라. 2008년에 보는 70년대, 답답함이 목구멍으로 치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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