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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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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의 우상

등록 2008-03-07 00:00 수정 2020-05-03 04:25

▣ 정재권 한겨레21 편집장 jjk@hani.co.kr

‘동굴의 우상’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영국의 철학자인 프랜시스 베이컨이 참된 인식을 가로막는 네 가지 우상 가운데 하나로 꼽은 것으로, 개인의 주관적인 성격이나 기질, 경험 때문에 편견이 생기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동굴에 갇혀 바깥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경우를 뜻합니다.
이런 갇힘 현상은 개인에게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갇혔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한 채 집단도 얼마든지 세상과 동떨어져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의 초대 내각이 보여준, 한 편의 블랙코미디 같은 ‘의혹과 해명 시리즈’는 그 생생한 방증입니다. ‘1% 내각’이라는 비아냥에 들어맞는 부동산 보유 실태 등은 둘째치고, 정말로 놀라운 것은 그들이 드러낸 공적 감수성의 부재입니다. 장관들의 말과 행동, 눈높이에선 제대로 된 공인의식을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경제정책을 총괄하는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은 인사청문회에서 “(지난) 10년 동안 상당 기간 정규직이 아니었는데 세금만 늘었다”고 볼멘소리를 했습니다. 종합부동산세를 겨낭한 불만입니다. 한데 강 장관의 아파트값은 그의 말로 치면 “노무현 정부 시작할 때보다 3배 정도 뛰었다”고 합니다. 5년 남짓한 기간의 집값 상승률을 과장했다손 쳐도 그에겐 천정부지로 뛴 아파트값보다 종부세 상승분만 눈에 들어오나 봅니다. 못 하나 꽂을 땅조차 없는 서민은 물론이고, 종부세 대상이 아닌 98% 국민의 가슴에 ‘못’을 박는 말입니다. 이윤호 지식경제부 장관은 “여의도가 살 만한 곳이 못 돼 송파에 아파트와 오피스텔을 분양받았”고, “(보유한 2개의 골프회원권은) 싸구려”라는 황당한 말을 늘어놓기도 했습니다. 장관직에 오르지도 못하고 낙마한 박은경·이춘호씨의 “자연의 일부인 땅을 사랑할 뿐”이라거나 “암이 아니라는 검사 결과가 나온 기념으로 남편이 오피스텔을 사주었다”는 발언과 눈높이에서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국민이 왜 분노하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할지 모릅니다. 재산이야 늘 만나는 사람들이 늘 하는 대로 늘린 것일 테고, 특별한 저항감 없이 나누는 생각과 느낌을 자연스럽게 얘기한 것일 테니 말입니다. 2004년 3월 한나라당이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한 뒤 총선에서 참패한 것과 얽힌 기억입니다. 탄핵을 주도했던 한나라당의 한 고위 인사는 나중에 이런 후회를 털어놨습니다. “내가 다니는 강남의 성당과 목욕탕에선 다들 탄핵하라고 하더라. 반대는 없었다. 탄핵이 민심인 줄 알았다.” 그때 그와 주변 사람들은 집단적으로 동굴에 갇혀 있었던 겁니다.
이명박 정부는 새 내각과 청와대 수석비서관 진용을 5천 명 가운데 고른 사람들이라고 치켜세웠습니다. 이 대통령 자신도 ‘베스트 오브 베스트’라고 자신감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왜 이들이 “워스트 오브 워스트”(김용갑 한나라당 의원)로 추락했을까요? 집단으로 동굴 속에서 ‘그들만의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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