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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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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그먼의 경고

등록 2008-02-29 00:00 수정 2020-05-03 04:25

▣ 정재권 한겨레21 편집장 jjk@hani.co.kr

“6개월이든, 1년이든 정기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가 지난 2월16~17일 과천 중앙공무원연수원에서 열린 워크숍에서 한 말입니다. 새 정부의 국무위원과 청와대 수석들이 처음으로 함께 모인 자리에서, 성과와 분발을 강조하려는 발언이었을 겁니다. 한데 참석자들에겐 한편으로 이런 서늘한 느낌도 들지 않았을까요? ‘이거 자칫 눈 밖에 나면 큰일 나겠는걸. 요령껏, 눈치껏 살자.’
참석자들은 새벽에 이 당선자와 연수원 대운동장을 15바퀴(약 5km) 돌았다고 합니다. 걷기와 가벼운 조깅이 건강에 좋다는 것이야 누구든 아는 일이지만, 그들이 모두 기꺼운 마음으로 새벽 바람을 맞았을지는 의문입니다.
2월25일 대통령에 정식 취임하기 전까지 이명박 당선자의 행보에선 ‘원맨쇼’의 느낌이 났습니다. 운동경기로 치면 감독과 스타플레이어를 혼자 도맡아 하는 모양새입니다. 이 당선자의 주변 인사들은 눈치껏, 요령껏 ‘예스’(YES)만을 외친 듯합니다. 그러다 보니 브레이크가 제대로 걸리지 않아 동티 나는 일이 적지 않았습니다. 영어 몰입 교육 방침은 나라를 들쑤셨고, 숭례문 복원에 국민 성금을 받겠다는 얘기는 많은 국민의 가슴을 한 번 더 태웠습니다. 그가 최고경영자(CEO) 기질을 유감없이 보여준 내각·청와대 수석 인사는 ‘고·소·영’(고려대, 소망교회, 영남)이나 ‘더블 SK’(서울시, 경상도, 소망교회, 고려대) 같은 신조어와 냉소를 낳았습니다.
그런 원맨쇼와 예스맨에 대한 비판적 여론 때문인지 취임 직전의 이 당선자 지지율은 50%를 조금 웃도는 정도로 나타났습니다. 새 대통령이 선출되면 취임 때까지 지지율이 올라가는 ‘허니문’이 일반적인데, 이 당선자의 경우엔 80% 안팎에서 50%대로 낮아지는 ‘거꾸로 추세’를 보인 겁니다. 민심이 달라지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작 걱정은 지금부터입니다. 당선자와 인수위 시절이야 계획이나 구상이 논란을 빚었을 뿐이지만, 이제는 대통령으로서 얼마든지 힘과 권한의 행사가 가능합니다. 이 대통령이 여태껏처럼 일방통행식으로 밀어붙이고, 주변의 파워 엘리트들이 눈치만 살핀다면 우리 사회는 예상치 않았던 큰 어려움에 부닥칠 수 있습니다.
CEO들은 대체로 ‘반대’라는 말을 싫어합니다. 일을 집행하고 성과를 내는 데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 탓에 반대에 귀기울이고 설득하기보다는, 반대 세력을 배제하는 방향으로 결정을 내리기 쉽습니다.
미국 프린스턴대학의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은 ‘국가는 기업이 아니다’라는 칼럼에서 “기업 경영과 국가 경영은 차원이 다르다”고 지적한 적이 있습니다. 국가는 기업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클뿐더러 무수히 많은 구성 요소들의 이해관계가 다양해, 하나의 기업처럼 단기적이고 단선적인 전략을 세울 수 없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 대통령이 크루그먼의 경고를 늘 기억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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