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재권 한겨레21 편집장 jjk@hani.co.kr
기자만큼 다양한 사람을 만나는 직업은 흔치 않을 겁니다. 하지만 경험에 비춰보면 그들 가운데 대개는 스쳐지나가듯 잊혀지고, 오랜 친분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한데, 어느 기자에게든 만남의 횟수나 집중도에 관계없이 ‘잊혀지지 않는’ 존재가 몇몇은 있기 마련입니다. 몇 년째 보지 못해도, 혹은 전화 통화로 안부를 확인하는 일조차 없어도 누구보다 잘 지내고 있을 거란 믿음을 주는 이들이 그렇습니다. 제겐 문혜림(72) 선생이 그런 존재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기실 문 선생을 직접 대면한 일은 없습니다. 1992년 취재한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의 ‘송종순씨 사건’ 때문에 당시 미국에 있던 문 선생에게 연락을 한 게 인연의 전부입니다. 그런데도 ‘페이 문’이라는 본명을 가진 미국인이라기보다는, ‘문혜림’으로 훨씬 친숙한 그의 삶이 여태껏 가슴속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송종순씨 사건’의 송씨는 그때 두 살배기 아들을 ‘살해’한 혐의로 20년형을 받고 수감 중이었습니다. 그는 평택에서 만난 주한미군과 결혼해 미국에 온 뒤, 이혼과 재혼을 거듭하며 홀로 아이와 살았습니다. 운명은 가혹했습니다. 그는 새벽에 레스토랑에서 퇴근하고 아파트로 돌아와, 아들이 넘어진 옷장 아래 깔린 채 숨져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경찰에 신고했지만, 경찰은 송씨가 아이를 죽인 뒤 위장했다고 판단했습니다. 경찰이 들이닥쳤을 때 넋을 잃은 송씨가 울부짖으며 “내 잘못이에요. 혼자 있게 내버려둬요”(It’s my fault. Leave me alone!)라고 외친 것이 범행의 시인으로 이해됐습니다. 그는 재판정에서도 “my fault”라는 말을 되풀이했다고 합니다.
이런 사연이 전해지자 문 선생은 팔을 걷어붙였습니다. 한국 어머니의 모성이 얼마나 끔찍하며, 한국인의 정서상 “my fault”라는 말은 자백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자책이라는 점 등을 널리 알렸습니다. 지난 1986년 의정부에서 기지촌 여성 지원단체인 ‘두레방’을 만들고 ‘양공주’라고 손가락질당했던 여성들의 고통을 함께했던 게 동력이었을 겁니다. 문 선생과 한인 사회의 노력으로 1년쯤 뒤 송씨는 사면을 받아 석방됐습니다. 당시 송종순씨 사건을 지켜보며 “문혜림 선생께 참 많은 것을 빚지고 있구나. 우리 누이의 일인데…”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그 마음의 빚을 이제는 조금 덜 수 있을까요? 은 미군 기지가 있는 평택 안정리에서 웅크린 채 살아가는 ‘기지촌 할머니’ 50여 명의 지난 세월을 들었습니다. 이제는 60~70대 할머니가 된 ‘양공주’들의 삶은 주한미군과 얽힌 우리의 과거이자 오늘이고, 미래의 한 모습입니다. 그 역사의 의미를 함께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멀리 미국 뉴저지에서 여생을 보내는 문혜림 선생의 건강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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