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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넌센스] 사이코패스의 나라

등록 2008-01-18 00:00 수정 2020-05-03 04:25

▣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사람이 살다 보면 가슴이 그저 먹먹해지는 순간들이 있다. 때는 1월10일 아침 9시를 조금 넘긴 시간, 이천 냉동창고 화재 희생자들의 빈소가 마련된 이천시민회관에서 유족들 먹으라고 자원봉사 단체에서 준비한 백설기빵을 훔쳐내 뜯어먹고 있었다. 지난밤 창고 주인인 코리아냉동의 사장이라는 사람이 유족들을 찾아와 엉엉 울며 “모든 것은 저의 잘못”이라고 말한 뒤 협상 타결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진 분위기였다. 밤새 한잠도 못 잔 얼굴의 유족 대표가 단상에 올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코리아냉동 쪽이 제시한 보상금은 6천만원”이라고 말했다. 협상에 참여했던 한 유족 대표는 “협상장에서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배를 짼 사람과 우리 앞에서 울며 절했던 사람이 같은 사람이 맞냐”며 울었다. 심리학에서는 상대에 대한 동정심이나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이기적 목적만을 추구하는 인격장애자를 ‘사이코패스’라고 부른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비슷한 일은 우리 주변에 무수히 널려 있다. 그날 아침 기사 검색을 하다 ‘악!’ 하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지난 1년 반 동안 15명이나 되는 젊은이들이 돌연사한 한국타이어 공장에 대한 한국산업안전공단 산업안전보건연구원 쪽의 역학조사 결과는 “죽음은 돌연사와 별 관계가 없다”는 것이었다. 세상에 해를 끼치는 사람은 공부 잘하는 박사들이라고, 연구원은 현장에서 일산화탄소는 거의 검출되지 않았고, 벤젠·톨루엔·크실렌 등 방향족 탄화수소도 포함돼 있지 않았으며 이황화탄소가 나왔지만 정량한계 미만이었다고 말했다. 노동계에서는 “한국타이어의 아드님이 대통령 당선자의 사위”라며 수군거렸고, 유족들은 하늘을 바라보며 가슴을 찍었다. 회사에서는 현장조사 직전에 작업장을 환기시켰고, 일부 사료를 바꿔치기했으며, 연구원은 작업장 내의 미세분진은 조사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이코’가 ‘패스’하는 데 꼭 칼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결국 떠오른 것은 한 남자의 죽음이었다.

2004년 4월28일 밤 11시께 서울 중구 청계천4가에 있는 한 공구상가 안에서 상인 이아무개씨가 천장에 줄을 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청계천에서 29년 동안 장사를 해온 그는 청계천 복원으로 교통이 불편해지면서 단골까지 뚝 끊겼다. 매일 라면으로 끼니를 때웠고, 목숨을 끊기 전날에는 차비가 없어 퇴근하지 못했다. “서울특별시 시장님, 천개천(청계천) 상인을 도우소서.” 철자법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삐뚤삐뚤한 필체로 그는 유서를 써 남겼다. 그가 죽은 뒤 1년이 지나 청계천은 완공됐고, 해마다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그곳을 찾게 됐으며, 그 바람을 타고 대통령직에 오른 사람도 있다. 그는 “상인들과 4천 번 넘게 만나 대화를 했고, 결국 모두가 자신의 뜻을 이해하게 됐다”고 말하곤 한다. 우리는 경쟁해야 하고, 싸워야 하고, 마침내 이겨야 한다.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생겨 난 희생 따위에 눈을 돌릴 여유는 없다. 대한민국은 이제 ‘사이코패스’의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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