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란주 아시아인권문화연대 활동가
얼마 전, 어떤 나라를 방문했다. 고달픈 그 나라 빈민의 삶을 알아보고 연대 방안을 찾아볼 계획이었다. 나는 시비가 걸린 만한 내용이 담긴 책과 자료는 다 빼놓고, 꼭 필요한 내용이 담긴 달랑 몇 장짜리 프린트물만 다른 책 사이에 끼워서 가져갔다. 책을 털어 종잇장까지 빼보지는 않겠지, 하는 방심과 뒤진다 한들 한글로만 된 자료를 알아보기나 하겠어, 하는 자만이 합세한 행동이었다.
몇 해 전, 역시 그 나라에 입국할 때, 나는 세관에서 가방을 탈탈 털면서 뒤져보는 통에 정나미가 떨어진 적이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검색이 그리 심하지 않아 가방 한 번 안 열어보고 무사통과하게 되어 잠깐이나마 마음 졸이고 꼭 필요한 자료까지 미리 뺀 것이 좀 멋쩍었다. 공항을 빠져나가면서 ‘이 나라가 좀 약해졌나’ 하고 생각했다.
이 나라가 좀 약해졌나?
그러나 그 나라 사람들이 심리적으로 느끼는 구속과 압박감은 여전했다. 그 자료를 본 친구들은, 약간 자조가 섞인 빈정 모드로 말하기를, 참 용감도 하십니다, 했다. 요즘은 한국 드라마 덕에 한국어 공부를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대충 외우면 될 것을 왜 들고 다니느냐며 여간 째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종이에 엄청난 내용이 적힌 것도 아니었다. 실망스럽게도 그저 ‘군부독재’라는 단어가 몇 번 나오고, 도시 빈민 발생에 군부가 어찌 기여했다는 내용이 있는 것뿐이었다.
그 나라 국민들은 언론이 심하게 통제되는 탓에 정치·경제적 상황을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 알거나 모르거나 간에, 나는 그와 관련된 질문은 아예 하지 말라는 엄격한 당부를 받았다. 그 밖에 외국인은 숙박업소가 아닌 일반 가정에서 잠을 자면 곤란하니 반가운 친구를 만나도 참고, 무엇인가 조사하거나 취재하는 듯한 행동을 하지 말고, 밤 9시 이후에는 돌아다니지 말라는 충고도 받았다. 그래도 몇 년 전 방문 때는 특정 정치인의 이름만 발설하지 않으면 정치적인 상황에 대해 궁금한 것을 묻거나 들을 수 있었다. 나와 친구들은 대화 때 그 정치인의 이름 대신 아줌마라는 은어를 사용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것조차 하지 말라고 했다. 한국어를 아는 사람이 도처에 많다나. 이미 눈치챘겠지만, 그 나라는 버마이고 그 아줌마는 아웅산 수치이다.
우리 ‘아줌마’가 넋 나간 세월을 보내고 어느새 할머니가 되었다. 그는 민주화운동에 뛰어든 88년 이후 18년 중에서 도합 11년7개월을 혼자 가택연금 상태로 보냈다. 지난달 또 1년 연장되면서 내리 5년째 감금된 상태이다. 버마 군부가 그의 정치적 영향력을 너무도 두려워하는 탓이다.
세계 곳곳에서열린 ‘아줌마’생일잔치
아웅산 수치의 62번째 생일을 앞둔 지난 6월17일, 한국 내 버마 민주화 활동가들이 모여 당사자도 없는 생일잔치를 열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동시에 여는 잔치라 했다. 우상화에 대한 경계심이 남다른 한국인에게는 낯설고 기이하게 보일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어떻게든 버마가 처한 상황을 알리고 동참과 지지를 요청하려는 것일 테니, 그 절실한 마음을 이해해 너무 낯설어하지는 말기를. 아웅산 수치를 어머니처럼 여기는 이들이 많아 분위기는 시종 무거웠고 간혹 눈시울이 붉어지는 이들도 있었다. 버마 내에서도 수치가 이끄는 정당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의 당원과 지지자 200여 명이 모여 생일잔치를 열고 그를 비롯한 정치범의 석방을 촉구했으며, NLD 여성조직은 그의 생일을 ‘버마 여성의 날’로 선포했다고 한다.
갇힌 수치에게도, 모든 정치적 자유를 빼앗긴 버마 국민에게도 ‘자유’가 필요하다. 또 대부분 대한민국 정부에 난민 신청을 한, 그러나 난민 인정도 받지 못한 채 대한민국에 갇힌, 갇힌 지도자의 생일을 맞아 서러운 버마 활동가들에게도 ‘자유’가 필요하리라. 어서 버마에 민주화 열기가 솟구쳐 승리하기를 간절히 응원한다. 며칠째 계속 입속에서 맴도는 구호 하나.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우리에게, 당신의 자유를 나눠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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