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항 발행인
신문이고 방송이고 올해 따라 별스럽게 ‘6월항쟁, 6월항쟁’ 한다 했더니 20주년이란다. 내 또래들의 술자리에라도 끼면 늘 그 이야기들이다. “요즘 대학생들은 6월항쟁이 뭔지도 모르더라고.” “아는 애들도 있지만 그냥 그런 일이 있었다지 아무 감회가 없어.” “요즘 애들이야 지 생각만 하지 사회문제에 도통 관심들이 없잖아.” “아, 체 게바라 티셔츠 입고 다니는 애가 체 게바라가 누군지 모르더라니까.” 이야기는 어김없이 아쉬움에서 개탄으로 변해가곤 한다.
그런 너희는 뭐 그리 다른데?
하긴 청년 시절 목숨까지 내놓고 군사 파시즘과 싸웠던 사람들이 요즘 청년들을 보면 왜 아쉬움이 없을까. 사회나 이웃에 대한 관심보다는 제 개인의 문제에나 집중하는, 한없이 사소하게 살아가는 그들을 보면 말이다. 그럼에도 그런 개탄의 소리를 듣자면 적이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런 너희는 지금 뭐 그리 다른데’ 싶어서다. 이제 삶이 사소하기로야 요즘 청년들보다 못할 게 없는 그들의 개탄은 우습다. 역사를 추억만 하는 사람들이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을 개탄하는 일은 말이다.
옛 투사들의 그런 심란스런 모습만큼이나, 민주화 20년이라는 한국 사회의 모습은 심란스럽기만 하다. 농민들은 제 나라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버림받았으며 현대판 노예 비정규 노동자는 끝없이 늘어만 가고 삶의 막장에 다다른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를 내세운 대부업자들에게서 기어코 거덜이 난다. 박정희의 딸(이자 정치적 아들) 입에서조차 ‘양극화’라는 말이 나오니 이게 과연 현실인가 코미디인가?
왜 이렇게 된 걸까? 민주화한 지 20여 년이라는데 왜 인민들의 삶은 민주화할수록 고단해져만 가는 걸까? 그 의문을 해결할 길이 없는 사람들은 민주주의고 진보고 다 필요 없고 오로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준다는 대통령 후보에게 몰려간다. 무지스런 시장만능주의자에다 개발주의자이기까지 한 그 후보가 대통령이 된다면 인민들의 삶은 더욱 거덜이 나겠지만 막막한 사람들은 제 막막함만큼이나 맹목적이다.
대체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민주주의란 말 그대로 인민이 주인이 되는 사회일 텐데, 인민이 주인이 된다는 건 무엇인가? 군사 파시즘이 물러가고 선거에서 자유롭게 한 표를 행사하고 언론의 자유가 생기면, 그걸로 인민이 주인인 사회인 건가?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위한 최소한의 준비일 뿐이다. 그럼 진짜 민주주의는 무엇인가?
이런저런 학술적이고 고상한 논설들을 넘어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 아이티의 한 소녀의 말이 가슴을 파고든다. “민주주의란 모든 사람들이 먹고, 학교에 가고, 병원에 갈 수 있는 것이다.”(아이티의 전 대통령 아리스티드가 지은 중에서) 그렇다, 그게 민주주의다. 한국 사회는 지난 20년 동안 민주화한 게 아니라 민주주의에서 점점 멀어져온 것이다. 그래서 인민들의 삶은 ‘민주화할수록’ 고단해진 것이다.
한국인들은 수십 년 동안 군사 파시즘과 싸웠다. 1987년 군사 파시즘이 물러나고 비로소 민주주의의 준비가 마련되었지만 바로 그 순간 더 큰 비극이 시작되었다. 한국인들이 벅찬 감회에 젖어 ‘민주화가 되었다!’ 축제를 벌일 때 그 틈새로 자본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바람이 들어왔다. 그 후 20년은 아무런 망설임도 견제도 없는 극단적인 자본화의 판이었다.
자본화의 선봉에 선 개혁세력은 민주주의의 준비를 민주주의라 거짓 선전하며, 군사 파시즘에서 벗어난 한국 사회를 차곡차곡 자본의 손아귀에 넘겨주었다. 행여 들킬세라 개혁세력은 끊임없이 조선일보니 수구기득권 세력이니 따위를 들먹이며 군사 파시즘의 공포를 환기했고, ‘모든 사람들이 먹고, 학교에 가고, 병원에 갈 수 있는 사회’를 좇는 사람들을 “비현실적이며 80년대식 몽상에 사로잡힌 사람들”로 몰아붙여 인민들에게서 격리시켰다.
그 결과가, 민주화의 허울을 쓴 자본화 20년의 결과가 오늘 우리 눈앞에 펼쳐진 이 심란스런 현실이다. 민주화 20년? 싱거운 소리들 마라. 억울하고 슬픈 일이지만, 한국에서 민주화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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