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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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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채

등록 2007-05-11 00:00 수정 2020-05-03 04:24

▣ 김규항 발행인

얼핏 듣기로는 근래 노무현씨의 지지율이 올랐다는데 그거야 그를 빨갱이라 ‘상찬하며 적대’하던 극우적인 사람들이 FTA를 통해 그의 사상 검증을 완료했기 때문일 테고, 정상적인 사고능력을 가진 사람들(극우적인 경향은 인간의 정상적인 정신 상태가 아니라는 뜻에서)로 말하자면 노무현씨의 지지율은 그 어느 때보다 바닥으로 보인다. 이젠 마치 노무현을 욕하는 게 시민의 기본 교양이라도 되는 듯 사람들은 그를 욕한다.

‘노무현이 변했다’ VS ‘원래 그런 인간이다’

오늘 노무현씨를 욕하고 경멸을 퍼붓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한때 노무현에 열광했던 사람들이다. 노무현의 진보성을 한껏 신뢰했고 개미떼처럼 힘을 모아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던 바로 그 사람들이다. 오래전 열광에 열중했듯 이제 경멸에 열중하는 그들을 보면 착잡하다. 물론 그들이 이제라도 ‘노무현의 진보성’이라는 몽상에서 빠져나온 건 다행이라 생각하지만 나는 착잡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예나 지금이나 그들은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 한 부류는 ‘노무현이 변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말하자면 노무현은 본디 진보적이었는데 집권하고 나서 점점 보수화했다, 는 말이다. 아마도 그들은 노무현씨의 민주화운동 경력과 나 수구세력과 갈등하는 모습에서 그의 진보성을 찾고, 자유무역협정(FTA)과 이런저런 반민중적 정책들에서 그의 보수성을 찾는 것일 게다. 그러나 노무현씨는 예나 지금이나 민주화운동 경력을 가진 나 수구세력과 사이가 좋지 않은 정치인이며, 예나 지금이나 신자유주의 노선이다(FTA나 이런저런 반민중적 정책들은 신자유주의의 다양한 실천 방식일 뿐이다). 노무현은 변한 게 없고 역설적이지만 그의 정치는 나름의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

또 한 부류는 ‘노무현은 원래 그런 인간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말하자면 노무현은 처음부터 보수적인 사람인데 진보적인 체 거짓말을 해댔다는 말이다. 이를테면 수많은 사람들을 선동하여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에 크게 기여했다는 한 지식인은 노무현씨가 고등학교 때 했다는 말까지 끄집어내며 ‘원래 그런 인간’이었음을 증명하려 든다. 앞서 말했듯 노무현씨의 정치는 나름의 일관성을 가진다는 점에서 나는 그의 말에 일단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인간에게 속은 그의 어리석음과 그런 인간을 터무니없이 미화하여 결국 대중들로 하여금 사회 진보에 환멸을 뱉으며 이명박 언저리나 배회하게 만든 그의 죄는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그들은 처음부터 그들의 열광을 만류했던 사람들, 개혁은 진보가 아니며 노무현의 진보성에 대한 기대는 결국 실망과 배신감으로 돌아올 것이라 충고했던 좌파들을 기억할 것이다. 좌파들을 ‘이념적 도그마에 빠진 비현실적인 몽상가들’이라 조롱했던 자신들이 몽상가였음이 밝혀진 오늘 그들은 왜 좌파에게 사과하지 않는 걸까? 사과는 않더라도 숙연한 태도는 가져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이 슬픈 현실을 반복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나는 그들이 이제라도 현실에 대한 좌파들의 견해를 경청하고 존중하길 기대한다. 다시 몇 년 후 오늘 현실에 대한 좌파들의 견해가 옳았음이 밝혀질 가능성을 정직하게 인정하길 기대한다.

부끄러움을 잊은 시절, 부끄러워하는 그 모습

내 주변에도 ‘사회 진보의 현실적인 차선책’으로 혹은 ‘수구세력의 집권을 막기 위해’ 노무현씨를 지지했던 사람들이 몇은 있다. 물론 그들은 이제 더 이상 노무현씨를 지지하지 않는다. 근래 나는 그들의 말을 노심초사 기다려야 했다. 행여 그들이 열광을 경멸로 바꾸어버린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면 어쩌나 싶어서였다. 사회적 이견을 가진 사람은 존중할 수 있지만 인격이 의심스러운 사람을 존중할 순 없다. 다행스럽게도 그 몇은 며칠 상관으로 자신이 지나치게 순진했음을 토로했다. 몹시 부끄러워하면서 말이다.

부끄러움을 잊은 시절, 정작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들이 도리어 세상의 문제를 풀 비밀열쇠라도 가진 듯 설쳐대는 기괴한 시절, 부끄러워하는 그 모습에서 광채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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