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재권 한겨레21 편집장 jjk@hani.co.kr
지난해 5·31 지방선거에서 여당이 참패한 이후 정치권에선 라는 책이 한동안 인기였습니다. 미국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가 쓴 것으로, 저자는 미국 선거에서 서민들이 왜 부자를 대변하는 공화당에 표를 주는지 물음표를 던집니다. 그러곤 이런 요지의 답을 내놓습니다. “공화당이 만든 프레임(개념·명제)이 공론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레이코프는 대표적 사례로 조지 부시 행정부의 슬로건인 ‘세금 구제(relief)’를 듭니다. ‘세금 인하(cut)’라는 말이 이렇게 바뀌어 널리 쓰이면서 세금은 부정적인 대상이 됐고, 부시 대통령의 감세정책에 반대하는 민주당 쪽은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화됐다는 겁니다.
이처럼 언어, 구체적으론 압축된 구호나 슬로건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경우는 많습니다. 정치·경제적으로 대립하는 세력 사이에선 ‘다수’의 지지를 획득하기 위한 효율적인 이데올로기 전파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경험이 있습니다. 1995년 초 재정경제원(지금의 재정경제부)은 한국은행으로부터 은행감독원을 분리하고 금융감독원을 신설해 금융기관 감독권을 통합하려 했습니다. 이때 한은이 들고 나온 구호가 바로 ‘한은 독립’입니다. 양쪽의 대결이 치열해진 상황에서 재정경제원의 한 고위 관리는 사석에서 이렇게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우리는 그놈의 ‘독립’이라는 단어 때문에 이길 수가 없다. 한국 사회에서 ‘독립’이라는 말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느냐?” ‘독립’이라는 구호의 덕인지, 아니면 “관치금융의 심화”라는 한은의 반박 논리가 통한 탓인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당시 금융감독원 신설은 없던 일로 됐습니다. 정부의 부동산 정책에 맞서 보수 언론이 ‘세금폭탄’이란 말을 유통시키고, 그 결과로 부동산 투기세력이 기득권을 지속시킨 것도 마찬가지 경우입니다.
4월2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타결된 뒤 사방에서 쏟아지는 ‘말잔치’에 어지럼증을 느낄 정도입니다. 보수 진영은 “제2, 제3의 개국”이라며 ‘개국론’을 내세우고, 그렇게 적대감을 표출했던 노무현 대통령을 향해 “국가적 지도자”라며 ‘노비어천가’를 부릅니다. 노 대통령도 “개방하지 않고 성공한 사례는 없다”며, ‘개방=성공’ 논리로 화답합니다. 성공을 원하는 자, 한-미 FTA를 반대해선 안 된다는 이데올로기의 유포입니다.
반면, 한-미 FTA 협상에 반대하는 진보 진영의 구호는 아직 뚜렷하지 않아 보입니다. 노동과 환경, 투자, 서비스 등 사회 각 부문의 법과 제도를 바꾸어 ‘시장의 강제동원과 개인 간 무제한 경쟁의 사회경제 체제’(정태인 전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를 만들어낼 것이라는 위기감은 높지만, 보수 진영의 구호를 압도할 프레임을 짜지 못하고 있습니다.
협상이 타결됐지만 당연히 끝은 아닙니다. 정부의 협정문 서명(비준)과 국회의 비준동의안 처리 등 긴 절차가 남아 있습니다. 여전히 장기전인 셈입니다. 보수 진영과의 이 장기전에서 승리를 이끌어낼 프레임, ‘불패(不敗)의 언어’가 무엇인지 진보 진영은 고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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