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항 발행인
홍길동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니 심장이 터질지라” 탄식했다는데 지난 십여 년 한국의 좌파가 꼭 그랬다. 극우파는 우파 노릇을 하고 개혁우파는 좌파 노릇을 하니 정작 좌파들은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투명인간이거나 기껏해야 ‘진보개혁 세력’이라는 해괴한 신조어로 개혁우파의 부록 취급을 당해야 했던 것이다. 그사이 개혁우파는 한국 사회를 오롯하게 신자유주의의 아가리에 집어넣었고 인민들은 ‘좌파 정권’이 가져다준 고단하고 존경 없는 삶과 캄캄한 미래에 진저리치며 이명박과 박근혜에게 몰려간다.
시작은 박정희의 ‘한국식 민주주의’
내 이야기에 이미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극우파니 개혁우파니 좌파니 하는 개념들 때문에 말이다. 얼마 전 이 잡지에 기고한 ‘10인의 진보논객’ 가운데에도 “그런 개념들은 지식인끼리나 쓰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가 여럿이었다. 나 역시 모든 사람이 ‘아비투스’나 ‘장기지속’ 같은 개념을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그런 개념을 모르면 세상을 제대로 살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 시대나 ‘불쌍한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해, 자기도 모르게 제 삶을 앗기지 않기 위해 알아야 할 최소한의 개념들은 있다. 지배계급은 언제나 인민을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으로 ‘개념 흐리기’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그 시작은 제 군사 파시즘을 ‘한국식 민주주의’라 설파한 박정희다. “우리의 정치가 서구식 민주주의와는 다르지만 적어도 북한과 대치하는 한국 현실에선 최선의 민주주의다.” 지금 들으면 참으로 가소로운 소리지만 당시엔 많은 사람들이 그 소리에 빠져들었다. 박정희가 간 지 30여 년, 이른바 민주화가 시작된 지 20년, 개념 흐리기의 전통은 여전하다. ‘한국식 민주주의’는 ‘한국식 진보’로 바뀌었을 뿐이다. 요컨대 노무현이나 유시민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진보가 서구식 진보와는 다르지만 적어도 수구 세력과 대치하는 한국 현실에선 최선의 진보다.”
개념 흐리기가 그 얼토당토않음에도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이유는 ‘한국 현실’이라는 포장 때문이다. 군사 파시즘을 무작정 민주주의라 우기거나 신자유주의 개혁을 무작정 진보라 우기는 게 아니라 “물론 서구식 기준에서 볼 땐 아니지만”이라고 먼저 한발 뺀 다음 “그러나 한국 현실에선” 하며 옭아매는 것이다. 세상에 내가 사는 사회의 현실에 기반하여야 한다는 지당한 말씀에 반대할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그렇게 민주주의는 아주 오랫동안 유보되었고, 또 진보는 아주 오랫동안 유보되고 있는 중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개념 흐리기’를 벗어나는 방법은 흐려진 개념을 ‘바로 세우는’ 것이다. ‘한국식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가장한 군사 파시즘’이라고 바로 세우고 ‘한국식 진보’는 ‘진보를 가장한 신자유주의 개혁’이라 바로 세우면 된다. 그러니 그런 와중에 “그런 개념들은 지식인끼리나 쓰는 것”이라고 비판하는 건 적이 위험한 태도가 된다. 왜 ‘주가’나 ‘재테크’ 같은 말을 모르면 이상한 사람으로 보면서 ‘신자유주의’나 ‘좌파, 우파’는 “지식인들이나 쓰는 말”이어야 하는가?
삶에서 생략될 수 없는 개념들
‘주가’나 ‘재테크’ 따위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 삶에서 떼어놓고 살 수 있다. 나도 그렇게 산다. 그러나 2007년의 한국에서 ‘신자유주의’나 ‘좌파, 우파’ 같은 개념을 삶에서 떼어놓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 개념을 무시하거나 모를 순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개념이 가리키는 현실이 내 삶에서 생략되거나 사라지진 않는다. 그 개념들은 단지 개념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간이나 뇌, 콩팥처럼 붙어 있는 현실이다.
초등학교 5학년 글짓기 시간, 짐짓 분개하여 데모하는 대학생 누나, 형들을 ‘한국 현실’을 근거로 비난하던 내가 떠오른다. 그리고 얼마 전 한나라당과 열우당의 미세한 차이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진보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내 말을 ‘한국 현실’을 근거로 비난하던 어느 대학생이 그 기억에 겹쳐진다. 현실은 슬프게 반복되고 있다. 아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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