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재권 한겨레21 편집장 jjk@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74434’. 한 공중파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우리에게 제법 익숙해진 숫자입니다. 해외로 유출된 우리 문화재의 수로, 되찾아야 할 민족적 자존심의 한 징표로 받아들여집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한겨울에 겉옷을 벗은 채 74434가 쓰인 팻말을 들고 무언의 시위를 벌이는 ‘공익광고’에는 가슴이 뭉클해지는 무엇이 있습니다. 프랑스에 있는 외규장각 문서나 일본 덴리대학에 소장된 안견의 몽유도원도 같은 국보급 상징물은 물론이고 사소한 생활용품 하나에 이르기까지 해외 유출 문화재는 우리의 역사와 문화, 삶의 지혜가 응축된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대개 19~20세기의 제국주의 침탈로 인해 빼앗긴 문화재를 되찾는 일은 우리만의 고민은 아닙니다. 총칼이 개입되지 않을 뿐, 이 시각에도 지구촌 곳곳에서 빼앗은 자와 빼앗긴 자 사이의 ‘소리 없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지난 1월30일 그리스 중·고교생 2천여 명은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흰색 끈을 서로 잡아 인간사슬을 만든 뒤, 대영박물관에 소장된 ‘엘긴 마블스’(Elgin Marbles)의 반환을 요구하는 침묵시위를 벌였습니다. 엘긴 마블스는 BC 5세기에 세워진 파르테논 신전 외벽의 대리석 조각품들로, 19세기 초 오스만제국의 영국 대사였던 엘긴 경(卿)이 파르테논에서 떼어내 영국으로 가져가 이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그리스는 수십 년 동안 끈질기게 이 대리석 조각들의 반환을 요구해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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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서울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돌려봅니다. 이곳의 수장고엔 투루판이란 생소한 곳에서 온 불화(佛畵)가 있습니다. 20세기 초 일본인 오타니 고즈이가 중앙아시아로 탐험대를 보내 지금의 중국 신장웨이우얼(위구르)자치구 투루판에 있는 한 석굴에서 도굴한 벽화의 일부입니다. 이 약탈물은 그 뒤 조선 총독에게 선물됐다가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7만4434점의 해외 문화재를 환수하자는 목소리의 뒤켠에서 투루판 벽화는 우리에게 어떤 말을 하고 싶었을까요? 우리가 약탈의 직접 당사자는 아니라 해도 말입니다. 은 지난달 투루판 석굴에서 100년을 지속해온 벽화의 소리 없는 울음을 들었습니다.
문화재는 한 민족의 삶과 정신의 결정체입니다. 고통과 영광, 절망과 희망이 뒤엉켜 흐르는 ‘제자리’에 있을 때 진정한 빛을 낼 수 있습니다. 벽화를 투루판으로 되돌려보내는 것은 어떨까요? 벽화의 ‘귀향’에서 우리가 손에 쥐는 게 없다손 쳐도, 해외 문화재 환수를 요구하는 우리 스스로의 목소리에서 자긍심은 좀더 커질 수 있을 겁니다. 또 침탈과 독점이 아니라, 화해와 공존이라는 21세기 ‘세계 시민’의 가치도 덤으로 키워갈 수 있지 않을까요.
갈 수 있든, 갈 수 없든 누구나 고향과 가족의 넉넉한 품을 생각하게 되는 설 명절입니다. 편안한 휴식의 설을 맞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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