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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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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이 나쁠 자격

등록 2006-12-08 00:00 수정 2020-05-03 04:24

▣ 권김현영 동덕여대 강사

신동일 감독의 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반성을 많이 했다. 매사에 불만투성이의 영화평론가이자 대학 시간강사 호준(김재록)과 내가 지독하게 닮아 있어서였다. 나도 꼭 호준처럼 밤늦게 택시를 타고 갈 때, 왜 여자가 이렇게 늦게 다니냐는 훈계를 듣고 열받아서 택시기사와 싸운 적도 있고, 영화관에서 앞자리에 불쑥 올라온 머리를 피해 다른 자리에 앉았다가 제자리에 앉아달라는 지적에 불쾌해서 싫은 소리를 한 적도 있다. 하지만 사실 앞으로도 그런 일이 있으면 미소 지으면서 상황을 현명하게 해결하는 식이 되지는 않을 거 같다. 나는 무엇을 반성한 것인가. 호준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여자를 사고, 자신과 의견이 다른 경우 주먹다짐도 마다 않는다. 하지만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 호준보다 착해서가 아니라, 호준처럼 못하기 때문이다. 호준처럼 성질대로 하지 못하는 이유는 호준처럼 보이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알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했던 반성은 사실 타인에게 호감을 사기 위해서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계산하는 데 불과했다.
이 바른생활 미청년이 착해진 이유

한편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 계상(강지환)의 바른생활 미소년 몸짱 청년 이미지는 불편했다. 계상의 이해타산적이지 않은 헌신성을 보면서 그가 그렇게 착한 청년으로 나오는 이유가 궁금했던 것이다. 이 영화에서 불평쟁이 시간강사 이혼남 호준은 철저하게 권력도 매력도 없는 존재다. 그리고 바른생활 미소청년 몸짱 계상은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것만 빼면 성격, 학벌(과외를 할 정도면 학벌도 된다는 소리), 몸, 젊음 등 자원들이 꽤나 많다. 품성 훌륭하고 매력 만점인 계상이 여호와의 증인이라면, 뭔가 그럴듯한 이유가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성격 나쁘고 매력 빵점인 호준이 여호와의 증인이라면, 편견의 골은 더욱 깊어졌을 것이다.

나는 이런 게 차별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외모주의의 문제가 아니라, 편견의 대상이 된 집단에 더욱 높은 도덕적 요구를 하는 것 말이다. 사실 편견의 대상이 된 집단일수록 성격이 나빠지거나 아니면 아주 비굴해질 확률이 높다. 하지만 나쁜 성격이 그 자체로 권력의 상징이 되고 권력의 효과로서 인정받으려면, 의 안나 조처럼 어마어마하게 돈이 많거나, 혹은 의 메릴 스트립처럼 유능해서 보통 이상으로 성공해야 한다. 안나 조가 기억상실에 걸려서 돈을 모두 잃는 순간, 그의 괴팍한 성격은 권력의 상징이 아니라 광자처럼 미쳤기 때문이라고 취급된다.

성격이 좋아지는 길은 관계가 열릴 때 가능하다. 편견에 찬 시선들 속에서 자신을 용기 있게 열어 보일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사람들은 모두 서로에게 잘 보이고 싶어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상대에게 잘 보일 이유가 없다. 일방적으로 상대가 자신에게 맞춰주기를 요구한다. 호준이 추했던 것은 그가 아무런 권력이 없는 주제에 상대에게 잘 보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계상의 선함은 자신에 대한 사회적 폭력에 생존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폭력에 그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그 흠을 제외하고는 흠잡을 데 없는 인간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차이를 불평으로 치환시켜버리는 폭력

그러나 사회적 약자가 자신에게 요구되는 더 높은 도덕적 요구를 충족시키면서 편견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편견은 권력자가 사람들 간의 차이를 없애버리고 동질화된 집단으로 재현하는 습관이다. 도덕적인 희생이라는 방법을 통해 인정받고 싶은 욕망은 바로 그 시선을 받게 되는 타자성 안에 있는 차이들의 분출들을 모두 불평불만분자로 치환시켜버리는 폭력에 다름 아닌 것이다.

착함이 상대에 대한 배려나 친절함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면, 진짜 착한 마음은 상대를 타자로 만들지 않고, 자신도 상대의 타자로 비굴해지지 않는 데 있다. 사랑받으면서 착하게 살고 싶은 욕망과 사회 구성원의 한 명으로 동등해지고 싶은 욕망이 서로 대치된다면 운동도 저항도 희망이 없어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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